폭격기를 몬 ‘밤의 마녀들’은 역사에서 지워졌다···쉽지만 냉혹하게 쓴 전쟁사[책과 삶]

임지선 기자 2023. 3. 1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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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마거릿 맥밀런 지음·천태화 옮김│공존│512쪽│2만7000원
독일군이 ‘밤의 마녀들’이라는 별명으로 부른 소련군 제588야간폭격연대의 여성 조종사들. 공존 제공.
탐욕·자기방어·감정·이념 등
인류 전쟁사의 원인·특징 분석
로마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고찰’

‘전쟁’이라는 단어만큼 현대인들에게 멀리 있어 보이지만 사실 가까운 말도 없다. 미디어에서 ‘빈곤, 암, 마약, 비만과의 전쟁’ 등과 같은 군대식 표현은 흔하다. 최근 SM엔터테인먼트를 두고 벌어진 카카오와 하이브의 대결을 언론은 대부분 ‘인수전’ ‘총력전’이라는 단어로 묘사했다. 지금은 하지 않지만 예전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할 때 부른 노래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되는 1950년대 진중가요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노래라고 하기에는 ‘하드코어’였다. 문명사회에서 ‘전쟁은 더 이상 없겠지’ 싶었지만 1년 전 우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실을 목도했다.

<역사 사용설명서> 등 역사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펴낸 마가릿 맥밀런 캐나다 토론토대 역사학과 교수 겸 옥스퍼드대 명예교수가 2020년 쓴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가 국내에 번역돼 나왔다. 영국 BBC 라디오 채널에서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기원전, 로마시대 전쟁부터 베트남전, 이라크전까지 전쟁에 관해 방대하고도 심도 있는 고찰을 풀어놨다.

저자는 전쟁을 도덕적 관념에서만 사유할 게 아니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전쟁이 우리의 말이나 언어표현에도 남아있고, 근대 국가 발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며 전쟁을 냉철하게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출간 당시 영미권에서 학자들 사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세계가 문명화되면서 전쟁이 근절되고 평화가 확장되고 있다고 주장한 학자들과 대립각을 세운 것이다. 책이 나오고 1년이 넘은 시점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내의 한 호텔이 지난 31일 러시아의 공습으로 무너져 있다. 연합뉴스
역사학자 마가릿 맥밀런의
BBC 강연을 단행본으로
출간 이후 영미권서 논쟁 촉발
서구 사회 중심의 ‘예시’는 한계

전쟁은 왜 일어날까.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각양각색의 이유가 있지만 저자는 반복해서 나타나는 특정한 동기들이 있다고 말한다. ‘탐욕, 자기방어, 감정, 이념’이 그것이다. 남이 가진 식량, 노예, 귀금속, 무역이나 영토에 대한 탐욕은 항상 전쟁을 촉발했다. 18세기 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러시아의 전쟁 등이 그랬다.

전쟁은 특히 중앙집권화된 국가에서 더욱 폭발했다. 강력한 국가가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었고 군대 규모가 커졌다. 중세 왕이 직접 고용하는 용병이나 지방 영주가 소집 명령했다가 작전 후 해산하는 구식 군대에는 새로운 전술을 훈련시킬 수가 없었다. “이것이 국가가 상비군을 만드는 데 강한 동기가 됐으며 당연하게도 나중에는 상비군이 국가의 권력을 강화시켜줬다.” 국가와 전쟁, 군대는 어쩌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민족주의의 등장은 전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저자는 1792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프랑스가 벌인 ‘발미 전투’를 상징적 의미가 있는 전쟁으로 꼽았다. 프로이센 측의 패배를 “전통적 스타일의 18세기 직업군인들이 지휘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열정을 바치는 대의를 위해 싸우는 새로운 스타일의 민간인들에게 패한 것”으로 평가했다. 민족주의는 전쟁에 대한 열광을, 산업혁명은 전쟁 수단을 제공한 것이다. 근대 전쟁은 과거보다 오래 지속되고 더 많은 비용이 들고, 더 많은 자원이 들어갔다. 저자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참략할 때 이끈 군사가 60만명이었으나 1944년 스탈린이 동부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650만명이라고 비교했다. 평화의 개념이 확산됐지만 참전군인 숫자는 줄지 않는다.

1982년 영국 버크셔주 그리넘코먼 공군 기지 주변에서 여성들이 미국의 핵탄수 순항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전쟁을 제한하거나 완전히 금지하려는 노력은 전쟁 자체만큼이나 오랫동안 계속 돼 왔다. 공존 제공.

‘전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장에서는 20세기 전쟁 규모가 커지면서 여성 입대가 늘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소련군 여성 병사 숫자는 상당했고 상당수가 자원자였다. 의무병뿐 아니라 전투병, 대공포 사수, 전차병 등으로 활약했다. 당시 독일군이 ‘밤의 마녀들’이라고 부르는 소련 폭격기 연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헌신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1979년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가 승리했을 때 대부분의 여전사들은 강제 제대를 당하거나 여성들로만 구성된 부대로 전출됐다.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싸운 여성들은 유공자 연금을 받지 못했다.”

저자는 전쟁의 역설을 여러번 말한다. 전쟁 하면 인명 피해와 자원 낭비 같은 손실, 혼란을 떠올리지만 전쟁은 변화와 진보도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국가가 건강한 신병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공중보건, 식생활, 주거환경, 교육 등의 개선이 이뤄졌다. 법질서 확립, 민주주의 확대, 사회복지 증진, 교육 개선, 여성과 노동자의 지위 향상, 의학을 비롯한 과학기술 발달 등도 같은 맥락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개발도 미국의 군사적 목적에서 시작됐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각종 역사 기록과 회고록, 문학작품, 영화 등을 소재로 전쟁을 설명한다. 전선에 실제로 나가 있는 군인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민간인의 복수심이 더 크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은 종종 전쟁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는 다소 색다른 내용도 여러 경로로 확인한다.

그렇다고 전쟁을 미화하는 건 절대 아니다. 저자는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에는 관성이 있어 시작하기보다 끝내기가 더 어렵다고 강조한다. 전쟁을 피하고 싶으면 전쟁을 도덕적으로 반대할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저자는 우주 전쟁, 사이버 전쟁 등 전쟁의 영역이 넓어지는 시점에서 ‘전쟁’에서 시선을 돌리지 말고 “그 어느 때보다 전쟁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전히 휴전 국가에서 살고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을 넘긴 시점에서 생각해볼 대목이 많은 책이다. 다만 등장하는 역사적 예시의 90% 이상은 서구 사회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익숙하지는 않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한 고찰이 없는 부분은 아쉽다.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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