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뻘 남자와의 사랑, 달리 말해 나의 발견[책과 삶]
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윤석헌 옮김 | 레모 | 112쪽 | 1만5000원
아니 에르노는 자기 내면 기억을 깊게 파고들면서 사회·정치 문제를 드러내는 작가다. 에르노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 강렬하고 솔직한 고백록에서 지금 시대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1990년대 중반 쉰 네 살 때 서른 살 연하 젊은 남자와 연애한 개인사를 다룬 최근작(2022년 출간)도 간결하고 압축적인 문장으로 계급, 젠더, 빈부, 임신중단 문제를 사유하며 지금 여기 문제를 환기한다.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10071057001
글쓰기를 위한 연애
이 연애는 ‘나’의 글쓰기 욕망에서 시작한다. “글을 쓰도록 나 자신을 몰아붙이기 위해 나는 종종 섹스를 했다. 섹스 후의 고독과 피로를 느끼며, 삶에서 더는 기대할 것 없는 이유들을 찾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장 맹렬한 기다림이 끝나고, 오르가슴을 느끼고, 한 권의 책을 쓰는 것보다 더 강렬한 쾌락은 없다는 확신을 갖고 싶었다.” 섹스는 “어떤 욕망의 다소 지연된 충족과는 다른 무엇” 즉 “일종의 계속되는 창작”이 되리라 여겼다.
‘나’는 “얼음장 같은 방바닥에 깔린 매트리스에서 나눈 사랑”이나 “테이블 한쪽에 차린 소꿉장난 같은 식사” 등을 두고 “내 젊은 시절이라는 연극을 혹은 정성스럽게 일화들을 만들며 소설을 쓰는 느낌, 혹은 그 소설을 체험하는 느낌”을 받는다. 젊은 남자는 ‘나’에게 ‘기억 전달자’이자 ‘(나와) 뒤섞인 과거’였다. “그와 함께 나는 삶의 모든 나이를, 내 삶을 두루 돌아다녔다.” 소설은 그 기록이다.
임신중단과 뒤엉킨 기억
“섹스와 시간, 기억”은 뒤엉킨다. 젊은 남자의 존재는 그가 태어나기 전 시간에 대한 ‘나의 기억’을 계속 끄집어낸다. ‘나’의 결론은 “현재는 과거를 복제한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루앙’이 그랬다. 젊은 남자가 살던 곳이다. ‘나’도 대학생이던 1960년대 그곳에서 살았다. 젊은 남자 집은 오텔디외 병원을 향해 있었는데, ‘내’가 대학생 때 ‘불법 임신중단’ 수술 후 출혈을 일으켜 실려간 뒤 엿새를 머문 곳이다.
‘나’는 젊은 남자와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델솔 광장의 한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 낸시 홀러웨이의 ‘나를 떠나지 마(Don’t make me over)’가 들려오자 1963년 11월 임신중절 수술을 해줄 의사를 곤혹스럽게 찾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당시 이 노래가 유행할 때 ‘나’는 “미친 사랑과 완전한 고독의 의미를 그 노래에 부여”했다. 젊은 남자가 “내가 임신했던 시기의 대학생 연인보다 겨우 좀 더 나이”가 들었다는 것도 확인한다.
https://www.khan.co.kr/culture/movie/article/202203091400001
과거와 현재는 꼬리를 물 듯 이어져 미래로 연결된다. ‘나’는 이 순간이 “단지 지독한 추억의 틀”이라는 점, 저 노래를 다시 들으면 “두 번째 기억”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관계 이후 오랜 시간 회피한 임신중단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에르노가 이 이야기를 소설로 낸 게 <사건>이다. 영화 <레벤느망>의 원작이다.
나이 듦, 나이 차, 부끄러움
젊은 남자는 ‘나’를 젊은이들이 드나드는 카페로 데리고 간다. 남자가 길을 가는 누군가를 두고 문과대학 교수라는 신호를 보내며 돌아보지 말라고 할 때 ‘나’는 “그는 나를 내 세대에서 빼내 주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세대에 속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어떻게 폐경한 여자랑 잘 수가 있냐?’라고 아무 생각 없이 물었으리라 짐작”하기도 한다.
이 짐작이 근거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레스토랑에서 근처에 앉은 손님들의 무례하게 질책하는 시선을 느낄 때” 나이를 깨닫는다. 에르노 작품 주제 중 하나는 부끄러움(수치)이다. 에르노는 다만 이 에피소드를 두곤 “일말의 수치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그 시선은 ‘아들뻘’ 남자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공고히 다져주었다”라고 쓴다. 이어진 문장은 다음과 같다. “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에.”
서른 살 차이는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젊은 여자에게 끌리지 않아?”라고 젊은 남자에게 묻는다. “그런데 그 질문은 내가 이제 젊지 않다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지칭했던 젊음이라는 범주에서 그를 배제했다.” 공공장소에서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 커플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은 경악에 가까워졌다. “마치 자연을 거스르는 조합을, 혹은 미스터리를 앞에 둔 것처럼. 그들은 우리가 아니라, 어렴풋하게 근친상간을 보고 있었다.”
젠더 역전과 계급
‘뮤즈’는 주로 남성 작가에게 영감을 준 여성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소설에선 그 관계가 뒤바뀐다. ‘나’는 그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내 삶을 텍스트를 지우고 그 자리에 새로운 텍스트를 쓸 수 있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상한 양피지로 바꾸어 놓았다.”
연애에서 주도권을 쥔 이도 ‘나’다. ‘나’는 여행 경비를 댔다. 젊은 남자가 자신에게 시간을 덜 낼까 봐 일을 찾지 말라고도 했다. 나는 “거래의 규칙들을 정하는 이”이자 “지배적인 위치”에서 “지배의 무기들”을 사용한 이다. 때때로 젊은 남자에게 “꺼져버려”라는 저속한 명령문을 썼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젊은 남자 부모는 빚에 시달렸다. 단기계약직으로 일했다. 젊은 남자도 가난했다. 할인 상품만 구매했다. 50상팀(100상팀이 1프랑) 싼 바게트를 구하러 먼 거리 빵집에 갔다. 대형마트 시식용 치즈를 다 쓸어왔다. “절실한 순간에는 어떤 우연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매주 스포츠 복권을 샀다.
‘나’는 젊은 남자에게서, 서민 계급 출신인 ‘나’의 과거 징표를 재발견한다. 이 징표는 현재 “그와 같은 세계에 있지 않다는 증거”다. “예전에 남편과 있으면서 나는 서민의 딸이라 생각했는데, 그와 있으면서 나는 부르주아가 되었다.”
에르노는 글쓰기를 “정치적 참여의 형식”으로 여기는 작가다. 그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적 현실로 하강한다”고도 했다. 그는 소설 출간 뒤 어느 인터뷰에서 젊은 남자를 자신의 ‘사회적 몸’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회 규범을 위반하는” 관계를 두곤 소설에서 “우리가 사회의 시선 속에서 이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그 이야기를 내가 관습을 바꾸기 위한 도전처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서술한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10190800001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도 이 문제의식과 이어진다. 에르노는 연설에서 임신중단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여전히 불법 임신중절 산파에게 중절을 받아야 하는 여성들을 처벌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자아이인 내 육체에 일어난 모든 일을, 쾌락의 발견을, 생리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에르노는 과거 자신의 욕망과 자만을 꺾은 ‘삶의 상황’을 두고는 “성별에 따라 그 역할이 정해지고, 피임이 금지되고, 임신 중단이 범죄인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의 차이가 가차 없이 짓누르는 삶의 상황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외국인과 이민자 배척, 경제적 약자를 향한 무관심, 여성의 신체 감시에 기반을 둔 이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가치는 언제 어디에서나 동일하다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내게 경계의 의무를 부여한다”고 말했다. “역사의 어떤 순간에 침묵은 정당하지 않다”고도 했다.
출판사 레모는 이 연설문을 부록으로 실었다. 책엔 프랑스어 원문을 붙였다. 에르노가 50대 시절 사진도 넣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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