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위해 ‘죄 만들어 놓고’ 수사·판결 하는 검사·판사[북리뷰]

나윤석 기자 2023. 3. 1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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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없는 죄인 만들기
마크 갓시 지음│박경선 옮김│원더박스
잘나가던 전직 검사였던 저자
형사 사법제도의 문제점 절감
무고한 사람 구명 단체 설립해
미국 1990년 이래 잘못된 기소로
유죄 피해본 사람만 2000여명
영국의 포렌식 전문가중 30%
“검찰에 도움되는 결과” 압박받아
판사 역시 정치적 야심 휩싸여
피고인에게 엄격한 판결 경향

넷플릭스 미국 다큐멘터리 ‘살인자 만들기’는 삼촌의 살인에 공범으로 가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10대 소년의 사건을 다룬다. 소년은 범행 일체를 자백해 구속됐으나 인권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소년의 나이와 인지 능력을 고려할 때 자백이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다큐멘터리는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통해 수사관들이 심문 과정에서 소년에게 “사건의 빈틈을 메워주면 걱정할 게 없다”고 회유한 정황을 폭로했다. 다큐멘터리 공개 후 소년의 사면을 청원하는 서명운동이 일어나는 등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마크 갓시 미국 신시네티대 법학 교수가 쓴 ‘죄 없는 죄인 만들기’는 다큐멘터리에 담긴 사례가 평범한 시민에겐 일어날 리 없는 비정상적 예외 상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잘나가는 검사였던 저자는 ‘죄 없는 죄인’을 만드는 형사 사법제도의 문제를 절감한 뒤 동료들과 ‘오하이오 이노센스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설립해 무고한 이들의 구명 운동에 전력하고 있다. 이 단체가 지난 20년간 무죄 석방을 이끈 재소자는 39명, 이들이 억울하게 옥살이한 기간은 무려 750년에 달한다. 저자에 따르면 1990년 이래 미국에서 잘못된 유죄판결의 피해자로 밝혀진 이는 2000명이 넘고, 이 숫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한국에선 멀게는 화성 연쇄살인, 가깝게는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 용의자가 누명을 쓰고 10~20년간 감옥에서 허송세월한 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가 있다. 저자는 자신이 몸담은 법조계의 어두운 그늘을 들여다보는 고백록에서 죄 없는 죄인이 만들어지는 구조적 원인을 파헤친다. “사법 시스템은 ‘정의의 여신’처럼 눈을 가린 채 정의를 실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불의에 눈감고 있다.”

오하이오 이노센스 프로젝트가 조사한 325건의 무죄 석방 사례 중 절반에 가까운 154건은 부정확한 포렌식에 기인했다. 이는 기억 오류에 따른 목격자의 잘못된 진술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같은 과학수사의 ‘비과학적’ 결과는 기술의 근본적 한계와 사법 시스템의 관료주의적 속성으로 인해 빚어진다. 포렌식은 순전히 객관적 과정이 아니라 비교와 대조를 거치는 주관적 작업에 가깝다. 과학수사 전문가인 지문 감식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스스로 오래전 ‘일치하는 지문’이라 결론을 낸 증거물이었음에도 연구진으로부터 ‘서로 다른 지문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접한 뒤 80%가 과거 기억을 잊고 답을 바꿨다. 이처럼 판단과 시선에 좌우되는 포렌식의 주관적 성격은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검찰과 경찰 조직의 관료주의와 만나 한층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저자는 기소 성공률을 높여 승진에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포렌식 팀에게 ‘필요한 결과’를 미리 언급하는 검찰 관행을 자신의 경험과 함께 털어놓는다. 예컨대 ‘탄도 검사’의 경우 “우리가 보기엔 총알들이 피고인의 총기에서 나온 거 같은데 맞는지 확인해주세요”라는 식으로 ‘정답’을 찍어 얘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기술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 조사에 따르면 영국 포렌식 전문가 중 30% 이상은 ‘검찰에 도움 되는 결과를 도출하라는 압박에 휘둘린 적이 있다’고 답했다. 저자는 “자기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대신, 자신이 속해 있으며 믿고 따르기로 한 ‘소속 기관의 것’으로 인식하는 검찰과 과학수사팀의 ‘공모’는 관료주의적 위계질서가 만드는 단면”이라고 꼬집는다.

최종 결정권을 쥔 사법부 역시 승진을 향한 욕망과 윗선에 잘 보이려는 심리가 얽힌 ‘정치적 야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고위직 판사를 선거로 뽑는 주(州)가 많은데, 선출직 판사들은 선거가 가까울수록 중대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한다. 범죄자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원하는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미 복역 중인 재소자의 무죄 가능성을 시사하는 추가 증거가 나왔을 때 실수를 인정하고 유죄 판결을 뒤집는 것은 사법부로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만큼 힘겨운 일’이다. 이와 함께 책은 확증 편향과 인지 부조화 등 인간 심리의 보편적 속성 역시 불가피하게 무고한 죄인이 생기는 원인으로 지목한다. ‘터널 시야’에 갇힌 듯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수사관의 확증 편향은 유도신문으로 목격자의 흐릿한 기억을 왜곡한다.

물론 저자는 검사와 경찰이 직관이나 추정을 배제하고 수사의 ‘형식적 지침’에만 얽매이면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처벌을 면하는 경우도 있으리라고 인정한다. 다만 사법 제도는 피해자들이 극도의 충격과 슬픔에 빠진 순간 품게 되는 밑바닥의 ‘보복 본능’을 따라선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다. 억울한 자를 만들지 않는 절차에 대한 깊은 감수성과 합리적 이해가 본능을 넘어서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전역의 25개 검찰청이 신설한 ‘유죄판결 진실부’나 과학수사 기관의 사건 정보 접근을 제한하는 스코틀랜드의 ‘맹검(blinding investigation) 원칙’은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다. 책이 보여주는 무죄 석방의 수많은 사례는 “범죄를 쫓다 보면 가끔은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안일한 방관자적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 ‘죄 없는 한 사람이 고통받는 것보다 열 명의 죄인이 도망가는 편이 낫다’는 것은 현대 사법제도를 이루는 흔들림 없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420쪽, 2만5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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