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전성기라는데…‘연습생 실종 사태’ [가요공감]
[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괜찮은 친구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연습생 찾기 참 어렵네요.” 최근 가요 기획사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말이다. K팝이 유례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속 연습생은 ‘운동, 음악, 연극 따위의 분야에서, 단체에 소속되어 연습을 하며 활동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며, 대중에 익숙한 개념이 됐다.
한때는 이 ‘연습생’ 입문 자체가 데뷔 못지않게 어려운, 하나의 관문으로 통했다. 아이돌이 되려면 연습생을 꼭 거쳐야 하기 때문, 선호하는 기획사의 연습생이 되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거나 오디션 투어를 도는 아이돌 꿈나무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다수의 가요 기획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연습생이 사라졌다. 톱4 급 기획사는 사정이 다를 수 있지만, ‘아이돌 명가’로 통하는 중견 기획사들마저 연습생 수급이 안 돼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다.
◆ 연습생 시스템 어떻게 굴러가나
연습생은 연예 활동 준비생이다. 기획사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해 보컬, 댄스뿐 아니라 프로듀싱, 언어, 연기 등을 가르치고 미용과 운동 등도 시킨다. 일부 기획사는 성교육 등 인성 교육까지 커리큘럼에 포함해 ‘연예인’을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한다.
시작은 오디션이다. 오디션을 통해 기획사에 들어갈 수 있다. 일부는 캐스팅을 통해 이 오디션 기회를 얻기도 하고, 연예 관련 학원과 기획사가 연계돼 오디션 기회를 얻기도 한다.
연습생으로 활동하는 동안 들어가는 비용은 대부분 기획사에서 지불한다. 투자 개념으로 이 금액은 데뷔 후 수입이 생기면 갚아나가야 하는 빚이다. 이 빚을 털어내고 실수입을 갖게 되는 ‘정산’은 아이돌들의 최종 목표일 정도로 큰 금액이다.
연예 기획사들이 오디션 등을 거쳐 재목을 뽑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연습생 한 명을 트레이닝하기 위해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투자자가 투자처를 신중히 고르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이에 최근에는 ‘연습생 예비생’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한 중견 기획사 관계자 A씨는 티브이데일리에 “연습생 전 단계로 수습 같은 느낌이다. 연습생으로서의 소양을 갖췄는지,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성실하게 트레이닝을 받으며 연습생 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3개월 정도 연습생 예비생 계약을 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 달라진 연습생의 ‘캐릭터’
◆ 재능 있는 연습생은 철저히 갑(甲)
엠넷 ‘프로듀스’ 시리즈가 연습생 시스템을 조명했을 때만 해도 연습생은 ‘을’의 느낌이 강했다. 회사의 ‘데뷔’ 명령이 하달되기 전까지 하염없이 데뷔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로 통했다.
물론 여전히 이러한 연습생이 대부분이다. 어찌 됐건 데뷔의 키를 기획사가 쥐고 있기 때문, 커리큘럼 내 있는 각종 평가들을 거쳐가며 데뷔를 기다린다.
수년을 기다려도 데뷔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방출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최근 중소 기획사의 걸그룹으로 데뷔한 멤버 B는 중견급 기획사에서 7년 이상 연습생 생활을 했지만 데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연습생 계약 해지를 당했다. 재능을 아깝게 본 댄스 트레이너의 소개로 신생 기획사 걸그룹 데뷔조에 합류했지만, 하마터면 꿈을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늘어났다. 재능 있는 연습생은 철저히 ‘갑’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기획사가 연습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생이 데뷔할 회사를 고르게 되는 경우다.
대형 기획사 출신 중소 연예 기획사 대표 C씨는 최근 데뷔조를 꾸리기 위해 연습생 미팅을 하며 ‘3개월만 연습생을 해보고 계속 할 지 결정을 하겠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연습생 예비생의 역 개념이 등장한 셈이다. C씨에 따르면 이 연습생은 3개월 후 다른 회사를 찾아가 또 같은 제안을 했다.
유명 연습생들은 FA 시장에 나온 연예인이 타 기획사와 접촉하듯 기획사 관계자와 비밀리에 접촉해 계약 관계를 조율하기도 한다. 데뷔 시기를 당기고 싶다거나 더 색깔에 맞는 회사를 찾아가겠다는 이유에서다.
방송 공개 오디션을 통해 데뷔하는 아이돌들이 시장을 선점하며, 공개 오디션 출연을 보장하는 회사만을 찾는 연습생도 늘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주된 이야기다. 최근 엠넷 ‘보이즈 플래닛’에 등장한 연습생 일부도 최근까지 타 기획사 소속이었던 경우가 눈에 띈다.
물론 그냥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습생 계약을 해제할 경우 트레이닝에 들어간 최소 비용 등은 토해내야 한다. 회사간 연습생 계약을 할 때는 더하다. 그럼에도 연습생 수급을 위해 이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다는 게 기획사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 “연습생 씨가 말랐다”
그만큼 괜찮은 연습생을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데뷔한 한 보이 그룹의 기획사 고위 관계자 D씨는 데뷔를 알린 후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멤버들을 어떻게 모았느냐”라고 했다. 그만큼 업계에 연습생이 부족하다고 했다.
A씨와 C씨 역시 같은 상황이라고 했다. 여자 연습생의 경우 상황이 더 나은 편이지만, 남자 연습생은 정말 “씨가 말랐다”라고 호소했다.
대형 기획사에서 유명 아이돌들을 캐스팅해온 한 연예 기획사 고위 관계자 E씨는 지난해 3개월 동안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더이상 새 얼굴의 연습생을 찾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E씨는 “조금 괜찮다 싶어서 명함을 건네면 연예 활동에 관심이 없거나 이미 타 기획사 소속, 대체로 대형 기획사 소속 연습생인 경우”라며 발로 뛰는 캐스팅 역시 전처럼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해외가 이 정도라면 국내는 정말 더 어려운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 “사라진 연습생은 어디에?”
연습생이 사라졌다고 해서 아이돌을 꿈꾸는 이들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이돌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연습생으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 모양새다. 방송 공개 오디션을 통한 한 방을 노리거나, 유튜브를 통한 셀프 데뷔를 하는 경우가 늘었다.
A씨는 “회사 데뷔조가 아닌, 오디션 출연만을 목적으로 회사에 적을 두길 원하는 연습생들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 “실력을 갖췄더라도 기획사의 데뷔 스케줄 등에 따라 데뷔가 미뤄질 수 있기 때문 당장 주목받을 수 있는 유튜브 등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라고 짚었다. 최근 유튜버들의 방송 진출이 잦아지며 이와 같은 케이스는 점점 더 늘어가는 추세라고도 덧붙였다.
K팝 시장이 커지며 연예 기획사가 늘어난 점도 연습생 기근 현상을 부추기고 했다. 회사간 경쟁이 치열해지며, 한 팀을 만들어내기 위한 품이 늘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이러한 기근 현상이 자칫 K팝 성장을 둔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고 있다. 기획사 관계자들은 “재목을 찾아 트레이닝을 해서 시장에 내보내고, 글로벌 시장에서 이들을 성공시키는 건 사실상 모든 가요 기획사들의 목표다. 이렇게 K팝의 흥행을 이어가야 하지만, 시작 단계인 연습생 수급부터 쉽지 않아 힘에 부친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티브이데일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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