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불효자는 웁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간다. 상실과 몰락은 생명을 품은 모든 존재의 불가결한 실존의 조건 중 하나다. 상실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삶은 많은 것을 잃는 경험 가운데 빚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애착하는 것들은 망각과 소멸, 세월의 파괴 속에서 자취 없이 사라지는데, 이 상실은 달콤하고도 씁쓸하다. 생에서 가장 큰 상실은 혈연의 사라짐일 테다. 혈연 중 누군가 죽으면 유품들은 소각되거나 증여되고, 소수의 물품만 보존되는 행운을 맞는다. 이마저도 세월이 흐르는 와중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모든 어머니는 바쁜 천사를 대신해서 이 땅에 온다고 했다. 그 천사가 지상에서의 소명을 다 하고 떠난 지 몇 해가 지나간다. 올해도 돌아온 어머니 기일을 혼자 조용히 보냈다. 모란과 작약이 피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사는 일에 치어 차츰 얇아지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머니와 시골집 거실에 둘이 있던 어느 쓸쓸한 저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심상한 어조로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는데, 어머니 죽음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탓에 나는 놀라고 무언가에 찔린 듯 아팠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슬픔이나 쓸쓸한 자락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하도 담담해서 내 마음은 패는 듯 아팠을 것이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때 나는 사춘기를 맞았다. 자식이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니 다루기 까다로웠으리라. 모성의 부재 속에서 보낸 유년기 내 무의식에 가라앉은 앙금이 원인이었을 테다. 어머니는 내 어린 입술에 젖을 물리고 배부르게 먹였겠지만 내겐 도무지 그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열두어 살 쯤 되었을 때 서울에서 온 한 소년을 만났다. 어머니의 고향 친구의 아들로 우리는 곧 친해졌는데, 그는 제 엄마의 젖이 모자라 내 어머니의 젖을 자주 얻어먹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는 기분이 야릇해졌다.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누구 잘못도 아니었지만 젖 떼자마자 유기로 인한 슬픔, 즉 스스로조차 인식하지 못한 분노와 고통이 내 무의식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농부의 딸로 자란 어머니는 배움이 많지는 않았으나 아득한 눈빛을 가졌으니 딱히 불우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머니는 결혼을 한 뒤 도시 변두리를 떠돌며 올라와 최저 생계수준의 삶을 이어가는 동안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가족 부양의 책임을 혼자 짊어졌다. 어머니가 모란과 작약 꽃을 사랑하고, 구불구불 흘러가는 강물과 골짜기를 사랑하셨다, 라고 나는 쓸 수 없다. 어머니는 가난이라는 최저 낙원에서 영혼이 깎이고 고통과 슬픔을 왜 감당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삶을 견뎌냈다, 라고 나는 쓸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에서 홀로 보내시는 어머니를 시골에 마련한 거처로 모셨다. 늙어가는 아들과 늙은 어머니 사이에는 어느덧 세월의 더께가 두터워져 그럭저럭 안온했다. 어머니가 텃밭에 작물을 심어 가꾸는 걸 낙으로 삼을 때 나는 서재에서 책이나 꾸역꾸역 읽었다. 아들이 묵언수행 하는 라마승이었다면 노모는 착한 보살 같았다. 어머니는 변덕스러운 운명에 시달리다가 경기도 남부의 한 요양병원에서 시난고난하는 생애를 마감했다. 한 상조회사의 도움을 받으며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는데, 나는 시종 담담했다.
살아가는 내내 가족 생계의 무거움에 짓눌린 채로 가난의 무두질이 거듭되며 착한 본성은 활짝 피지 못한 채로 어머니 영혼은 삭막해지고, 내면의 부드러움과 덕성은 말라붙었을 테다. 시나 음악 같은 예술의 효용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생전의 어머니에게 나는 반항했다. 철부지 아들의 성냄과 엇나감에 어머니는 난감했으리라. 더러는 엇나가는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뜬 눈으로 지새운 밤들도 있었으리라. 아, 어머니, 불효자는 웁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나의 어머니'라는 시에서 죽은 어머니의 체중이 얼마나 가벼운지 땅을 누르지 않는다, 라고 쓴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노화가 진행되며 몸피가 눈에 띄게 줄고, 죽은 뒤에는 나비보다 꽃잎보다 더 가벼워진다. 내 어머니가 묻힌 땅도 전혀 그 무게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세월 갈수록 어머니를 겨냥했던 내 거친 분노와 메마름이 불효의 증표였다는 회한에 자꾸만 가슴이 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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