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마음은, 현실에서 정말로 생명을 얻을까?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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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아버지의 오랜 친구분과 만났을 때였다.
살다 보면 종종, 간절한 마음이 현실에서 믿기 힘든 일을 만들어내는 광경을 볼 때가 있다.
현실에서, 간절한 마음이 정말로 생명을 얻을까?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 내게 잠깐이나마 아버지를 데려다주었던 것도 정확히 그런 범주의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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묽은 것
최영희 지음 l <우주의 집> 수록(사계절, 2020)
돌아가신 아버지의 오랜 친구분과 만났을 때였다. 백발의 노신사는 앞에 앉은 중년 여성에게서 일찍 세상을 뜬 친구를 보고, 마흔 후반의 중년 여성은 눈앞의 노신사에게서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노신사분과 헤어져 집에 오는데, 옆에 누군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집에 돌아온 뒤에도 이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내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주는 그런 기운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따뜻한 공기 덩어리의 움직임 같은 것이.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나는 확신한다. 그때 아버지가 내 곁에 오셨다 가셨다고.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옆에 머물다 가셨다고.
살다 보면 종종, 간절한 마음이 현실에서 믿기 힘든 일을 만들어내는 광경을 볼 때가 있다. 누군가 크게 다치는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그의 연인이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든가, 큰일을 앞둔 사람이 꿈에서 그 일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받는다든가 하는 일화를 우리는 종종 접한다. 기적, 예지력, 초능력 같은 개념과 연결될 이런 일화를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마음의 작용일 거라고. 마음이 현실 세계에서 형상을 얻어낸 것이리라고.
‘묽은 것’은 그런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우물 뒤편의 허공이 출렁이고, 소용돌이가 일고, 그 속에서 한 노파가 튕겨 나온다. 노파의 정체를 궁금해할 겨를도 없이, 화자는 누군가를 살해한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살인이다.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모호하고, 앞뒤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다음 장면이 궁금해 죽 따라가게 된다.
화자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낯선 곳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동안 접해온 이들과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다름’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마침내는 제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을 알게 된다는 설정은 전형적인 여행소설 혹은 성장소설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화자가 발견하는 ‘진실’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튀어나오는 반전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 모든 전형성들이 일제히 특별한 색채를 입고 반짝거린다. 소설 속 인물인 이부키 교수가 “극심한 긴장 상태에 놓인 인물에게서 생체 에너지 일부가 떨어져나온다”라고 말하는 장면부터 소설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전환되고, 독자는 급속도로 나머지 분량을 읽어나가게 된다. 마지막 결론에 이른 다음에는, 복잡한 감정을 갖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된다. 간절한 마음은 남는다. 살아남아 형태를 얻고 자생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마도 이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나 상서롭다. 현실에서, 간절한 마음이 정말로 생명을 얻을까?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이 내게 잠깐이나마 아버지를 데려다주었던 것도 정확히 그런 범주의 일이었을 것이다. 짧지만 많은 장치가 담겨 있는 소설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이런 ‘마음의 생명력’이었다. 소설이 다루는 화두 자체에 집중하는 이들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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