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그 여행은 펜티멘토가 되었다 [책&생각]

한겨레 2023. 3. 1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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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이 함께 여행을 떠난 이야기라면 흔히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다.

모국어가 서로 다른 엄마와 딸이 처음으로 나선 여행은 그 욕망에 닿기 위한 행위이고 실천이므로 이 여행은 감히 과거를 바꿀 수도 있는 시간여행이라 할 만하다.

딸이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 쓰는 글의 펜티멘토는 분명 홍콩 시절의 엄마와 이주민이 된 이후의 엄마와 딸과 함께 낯선 나라를 조용히 여행했던 노년의 엄마까지 켜켜이 쌓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의 일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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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의 다시 만난 여성]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제시카 아우 지음, 이예원 옮김 l 엘리(2023)

엄마와 딸이 함께 여행을 떠난 이야기라면 흔히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다. 어느 한쪽의 집착과 상대의 탈주 욕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랄지, 묵은 과거를 둘러싼 영영 해소되지 않을 갈등이랄지. 얼핏 출산과 육아의 재현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모녀간의 이야기에는 고통과 상처와 체액과 분열과 기이한 행복감이 교차한다. 그러나 제시카 아우가 진술하는 모녀의 일본 여행기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가만하며 쓸쓸함과 호젓함 사이를 고요히 걸어간다.

더 이상 같이 살지 않고 자주 연락하지도 않는 엄마와 딸은 각자 다른 도시에서 다른 비행기를 타고 도쿄에 도착한다. 도쿄의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가고 이후 오사카로 교토로 향하는 일정은 사실 전부 딸의 선택이다. 딸은 여행지로 엄마를 이끌면서 조용히 엄마의 안위를 살피고, 엄마는 딸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해도 자신의 감상이나 주장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갈등하거나 싸우지 않지만 특별히 교감하는 것 같지도 않다. 같은 공간을 나란히 걸으며 미술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두 사람의 시간과 공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소설의 화자가 딸인 만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딸의 시선으로 엄마를 바라보게 되는데, 화자가 엄마에게 들려주는 과거의 경험들과 엄마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상념의 진술 형태로 독자들에게만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딸과 엄마가 ‘따로 또 같이’ 박물관 안에 머물며 서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만났다 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 이해와 몰이해의 줄타기를 경험한다.

기승전결이라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 소설의 전개는 ‘엄마의 첫 언어가 광둥어이고 내 첫 언어는 영어인 점과 우리가 언제나 그중 한 말만 쓰고 다른 말은 쓰지 않는 점’과 겹쳐진다.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유창한 말이 내 온몸을 흐르고, 내가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 누군가가 나를 알아가는’ 궁극의 순간을 향한 욕망이고 그 욕망은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더욱 절박하다. 그런 면에서 언어를 향한 욕망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의 쌍생아다. 모국어가 서로 다른 엄마와 딸이 처음으로 나선 여행은 그 욕망에 닿기 위한 행위이고 실천이므로 이 여행은 감히 과거를 바꿀 수도 있는 시간여행이라 할 만하다.

여행 마지막 날 엄마는 딸의 일에 관해 묻는다. 딸은 옛날 회화 작품 중 상당수에서 발견되는 ‘펜티멘토’에 관해 말한다. 화가가 의도적으로 덧그리거나 덧칠했음이 드러나는 먼저 그린 그림의 층인 이 펜티멘토는 과거의 일을 실제로 일어난 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보다는 우리가 보는 대로 빚어내는 글쓰기와 일치하는 지점이라고 작가인 딸은 대답한다. 딸이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 쓰는 글의 펜티멘토는 분명 홍콩 시절의 엄마와 이주민이 된 이후의 엄마와 딸과 함께 낯선 나라를 조용히 여행했던 노년의 엄마까지 켜켜이 쌓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가 방금 덮고 저절로 눈을 감아버린 이 한 권의 책처럼 말이다.

이주혜/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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