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자유주의 말고, 민주정이라는 토대에 집중하라
자유주의와 민주정의 결합은 불가피하지 않아
“정치적 실천”으로서 민주정의 조건들 탐색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자유주의 없이도 다양성을 지키며 번영하는가
조사이아 오버 지음, 노경호 옮김 l 후마니타스 l 2만4000원
보편적 인권을 토대로 개인의 자율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가치 체계인 자유주의(liberalism)는 오늘날 위기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좌파는 자유주의가 엘리트주의, 글로벌리즘, 약탈적 자본주의 등과 결합해 있다며 비판하고, 우파는 자유주의가 세계시민주의, 다양성 찬양과 정체성 정치, 전통적 가치에 대한 경시 등을 불러왔다고 비판한다. 덩달아 위기에 놓인 것은 민주주의다.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의 영향 아래 근대 사회 전체가 자유주의와 민주정의 결합을 한 묶음으로 다루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민주정’이란 관념은 20세기 중반에야 나타났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를 주로 연구해온 미국의 정치학자·고전학자·철학자 조사이아 오버 스탠퍼드대 교수는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정의 결합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자유주의와 결합하기 훨씬 전부터 민주정은 그 나름의 원리와 체계를 이미 확립했고, 우리는 자유주의와 엮이지 않는 ‘원초적 민주정’(Basic Democracy)의 이론을 구축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이를 고대 그리스 아테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은이는 “민주정이 자유주의를 포함해 다른 어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이론과 결합되지 않고도 그 자체만으로 여러 가지 바람직한 생존 조건들을 효과적으로 증진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 말한다.
지은이의 작업에는 크게 두 가지 목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 없는 민주정은 ‘다수의 폭정’이 될 거”라 우려하며 자유주의적 가치에 집착하고 되레 민주정의 가치를 외면하고 마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엘리트 독점’을 반대한다는 “반자유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이 민주정이란 이름으로 내놓는 주장들의 공허함과 오류를 폭로”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도덕적 신념 체계”인 자유주의와 “정치적 실천들의 집합”인 민주정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따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집단적 자기 통치’라는 민주정 본연의 가치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탐색하려 한다.
아테네 민주정은 원초적 민주정, 곧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정’이 역사적으로 실존했고 그것이 어떤 기반 위에서 어떻게 구축됐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지은이는 그것이 일각에서 말하는 ‘다수의 폭정’으로 실패한 체제가 아니라 ‘시민들에 의한 집단적 자기 통치’로서 제대로 작동했던 체제였다고 주장한다. 다수(hoi polloi)가 아닌 전체 인민(demos)과 공직의 독점(arche)이 아닌 긍정적인 권력 행사(kratos)가 조합된 말은 민주정(democratia)이 ‘전체 인민의 집단적인 자기 통치’임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한정한 힘의 행사를 ‘제약’하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테네 민주정은 성문화된 법률들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헌정 질서를 고치려 할 때에는 훨씬 더 까다로운 개정 절차를 요구했다. ‘도편추방’을 실시할 때에도 사전의 합의, 1년에 한번 시행, 최대 추방 기간은 10년 등의 제한이 붙었다.
이어서 지은이는 ‘데모폴리스’라는 원초적 민주정 체제를 건국하는 상황을 제시하는 사고실험을 전개한다. 데모폴리스의 건국자들은 여느 국가들처럼 안전과 풍요를 목표로 삼는데, 여기에 절대적 지배자(전제정)가 없는 ‘비폭정’이 목표로 더해진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 체계를 공유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합리적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전략적으로 행위하고, 사회적이며,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의 집합체가 되어 ‘자기 통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폭정’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들은 통치에 ‘전원 참여’해 그 비용과 이익을 적절히 공유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교육과 분배 등이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원초적 민주정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조건이 나온다.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평등’, 그리고 이런 참여의 바탕이 되는 ‘시민적 존엄’이다. 무엇보다 비폭정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 공동체에서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귀결로 이런 것들이 추출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개인의 자율성, 타고난 인권, 분배 정의 등 자유주의 같은 특정 신념 체계에 선행하는, 민주정 고유의 원리란 것이다.
그렇다면 원초적 민주정은 다른 비민주정적 대안에 견줘 매력적이며 합리적 선택을 받을 만한 사회질서, 곧 안정과 풍요를 제공하는 사회질서인가? 토머스 홉스는 자기 욕망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민이 집단행동을 할 수 없다고 봤고, 일부 현대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자기 통치’ 개념에 대해 불신과 회의를 드러내곤 한다. 지은이는 “한 사회가 충분한 수준의 안전과 풍요를 유지할 만큼의 공공재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협동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데, 여기서 민주정이 전제정보다 훨씬 더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자유, 평등, 존엄이라는 민주정의 조건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친 인적 자원에 대한 합리적 투자를 증진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투자로 더욱 수준 높아진 유용한 지식들은 합리적으로 공개하고 교환하는 과정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지은이는 민주정이란 것은 상부구조가 아니라 이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라는 점을 강조한다. “민주정이라는 토대가 자유주의적인 제도와 규범, 비자유주의적인 제도와 규범 양자를 모두 떠받칠 수 있는 것이라면, 토대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이지도 반자유주의적이지도 않아야 한다.” 안정적인 정치적 토대 없이 그 어떤 상부구조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 반대로 토대가 굳건하다면 상부구조는 언제든 해체하거나 다시 쌓아올릴 수 있다. 지은이는 “원초적 민주정 이론은 (도덕적 신념 체계를 뛰어넘어) 안전과 풍요, 비폭정을 이룰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을 마련한다”며, 앞으로 도래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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