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동아시아 근대 개념어는 이렇게 태어났다

고명섭 2023. 3. 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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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계몽사상가 니시 아마네
철학‧과학 등 근대어 창출 선봉
1870년 강의록 ‘백학연환’ 통해
서양 언어 이해‧번역 과정 추적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서양 학술용어 번역과 근대어의 탄생
야마모토 다카미쓰 지음, 지비원 옮김 l 메멘토 l 3만5000원

동아시아 ‘근대’는 서양 언어의 번역과 함께 시작됐다. 근대 개막기에 수많은 서양의 개념어들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어휘로 들어왔는데, 이 개념어 번역의 최전선에 섰던 곳이 일본이다. 당시 일본의 계몽 지식인들이 앞장서 서양 언어를 번역하고 그 말들이 한국과 중국으로 들어와 근대 어휘를 형성했다. 이 번역어 창출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유신 시대에 활동한 계몽사상가 니시 아마네(1829~1898)다. 니시는 철학‧과학‧예술‧문학‧심리‧기술‧이성‧권리‧의무 같은 오늘날 쓰는 수많은 학문 용어를 창안한 사람이다. 일본의 독립 연구자 야마모토 다카미쓰(52)가 쓴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서양 학술용어 번역과 근대어의 탄생>은 <백학연환>(百學連環)이라는 니시 아마네의 저술을 꼼꼼히 읽어 그 안에서 근대 개념어가 창출되는 과정을 살핀 저작이다.

서양 언어 번역을 통해 철학· 과학 같은 근대 학술 용어를 창출한 일본 계몽사상가 니시 아마네. 위키미디어 코먼스

니시 아마네는 어려서부터 한학에 특별한 소질을 보였으나, 1854년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세상이 급속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서양 학문을 배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862년 에도 막부의 명령을 받고 네덜란드로 유학해 3년 동안 레이던대학에서 법학‧경제‧통계‧철학을 배우고 1865년에 귀국했다. 메이지유신(1868) 이후 니시는 교토에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사숙을 열었는데 ‘백학연환’은 1870년 이 사숙에서 학생들에게 한 강의의 기록이다. 이 책의 지은이 야마모토가 주로 살피는 것은 이 강의록 맨 앞에 등장하는 ‘총론’이다. 총론에서 니시는 ‘백학연환’ 전체를 아우르며 강의의 얼개를 미리 보여준다. 이 총론은 전체 30쪽 분량에 지나지 않지만, 야마모토는 인터넷 문서고(아카이브)를 샅샅이 뒤져 이 총론에 등장하는 말들의 연원과 배경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그 추적의 과정은 근대 초기에 서양 학문 용어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번역되는지에 관한 세밀한 지도를 그리는 과정이 된다.

이 책이 먼저 주목하는 것은 강의록의 제목인 ‘백학연환’이다. 백학연환은 오늘날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말인데, 니시의 강의록은 백학연환이 영어 단어 ‘엔사이클로피디아’(Encyclopedia)를 번역한 것임을 먼저 밝힌다. 이어 엔사이클로피디아의 어원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뿌리가 그리스어 ‘엔키클리오스 파이데이아’(enkyklios paideia)에 있다고 말한다. 또 이 말이 ‘어린아이를 바퀴 안에 넣어 교육한다’는 뜻이라고 부연하는데, 이 설명은 어딘지 어색해 보인다. 지은이 야마모토는 니시의 말이 과연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그리스어의 의미를 살펴 들어간다.

먼저 ‘파이데이아’를 보면, 이 단어는 ‘양육‧훈육‧교육’, 나아가 교육의 결과로 몸에 익힌 ‘교양’이라는 뜻을 함께 거느린다. 또 ‘엔키클리오스’라는 말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둥글다’라는 뜻이다. 날마다 태양이 떠서 둥근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것을 떠올려볼 수 있는데, 여기서 파생한 것이 ‘정기적인·일상적인·통상적인’이라는 의미이며, 여기서 더 나아가 ‘일반적인’이라는 뜻이 나왔다. ‘엔키클리오스 파이데이아’는 요즘 말로 하면 ‘일반교양’을 뜻하는 셈이다. 이 말이 라틴어로 번역돼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 곧 ‘자유학예’가 됐으며 그 말이 근대 유럽어로 정착해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곧 ‘교양과목’이 됐다.

이 책은 이런 설명과 함께 로마 시대 초기의 사람들이 ‘엔키클리오스 파이데이아’를 ‘둥근 고리를 이룬 교양’라는 뜻으로도 이해했음을 알아낸다. 니시 아마네는 바로 이런 의미에 주목해 ‘엔키클리오스 파이데이아’의 영어식 표현인 ‘엔사이클로피디아’를 ‘백학 곧 온갖 학문이 사슬로 연결돼 있음’이라는 의미로 ‘백학연환’이라고 옮겼다. ‘학문 전체를 아우르는 기초적인 교양 쌓기’를 가리키는 말이 백학연환인 것이다.

이 책이 더 주목하는 것은 총론에 등장하는 ‘학술’(學術)이라는 항목이다. 니시가 ‘학’과 ‘술’이라고 옮긴 말은 각각 영어의 ‘사이언스’(Science)와 아트(Art)에 해당한다. 이때의 ‘학’은 학문을 뜻하는데, 니시는 강의록에서 “근원과 유래부터 파악하여 그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을 학문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근원과 유래를 파악해 그 진리를 알아가는 것이 니시가 말하는 학 곧 학문이다. 이어 ‘술’에 대해 니시는 이렇게 말한다. “술이란 규칙을 조직화한 것으로 어느 행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어 니시는 ‘학’과 ‘술’을 아울러 라틴어 단어를 인용해 가며 이렇게 설명한다. “학에서는 알기 위해 알며(scimus ut sciamus), 술에서는 만들기 위해 안다(scimus ut producamus).”

이 책은 니시의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출전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에까지 이른다. '학'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에피스테메(episteme, 지식)이고 ‘술’에 해당하는 단어가 테크네(techne, 기술)인데, 이 에피스테메와 테크네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구분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목수와 기하학자’의 사례를 들어 에피스테메와 테크네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한다. “목수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기 때문에 직각을 구하지만, 기하학자는 진리를 알기 위해 직각을 구한다.” 목수는 물건, 예를 들어 책상을 만들기 위해 직각을 구하고, 기하학자는 진리를 알기 위해, 다시 말해 앎 자체를 알기 위해 직각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피스테메가 라틴어 스키엔티아(scientia)를 거쳐 사이언스가 되고, 테크네가 라틴어 아르스(ars)를 거쳐 아트가 됐음이 드러난다.

지은이는 니시 아마네가 서양 언어의 이런 근원을 다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백학연환’은 니시가 분명히 언어의 뿌리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양 언어의 근원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이므로 요즘에는 산스크리트를 익히는 것이 주된 흐름이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니시의 관심이 확인된다. 니시는 서양 말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유학 공부를 통해 터득한 한자어의 본디 의미와 결합해 근대 개념어를 창출했던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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