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슨·애트우드·손택…작가들이 나를 ‘통과’했다 [책&생각]

한겨레 2023. 3. 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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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번역가를 찾아서]번역가를 찾아서 │ 김선형 번역가
“체험 지향적” 영문학 번역가 김선형
원작 소설과 유사한 경험 살리려
허스트베트 에세이, 제인 오스틴 전집…
‘작가 김선형’으로서 써야 할 책들도
지난 8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작업실이자 자택에서 만난 김선형 번역가.

토니 모리슨, 마거릿 애트우드, 실비아 플라스, 조앤 디디온, 수전 손택, 시리 허스트베트…. 이 작가들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김선형 번역가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그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의 유려한 문장들을 타고 독자는 이 작가들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시작은 “우연한 인연”이었다. 서울대에서 르네상스 영문학 박사 과정을 밟던 시절인 1995년, 에스에프(SF)문학 전문가 박상준의 제안으로 아이작 아시모프의 에세이와 단편소설을 번역했다. 이후 28년간 번역을 쉬지 않고 해온 그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한 해 한 작품에만 주는 ‘유영번역상’을 지난 2010년 받았다.

그에게 문학 번역은 “무대 없는 공연”이다. “연극 <햄릿>은 전 세계에서 날마다 한 편씩 공연된다지만 같은 프로덕션은 없지요. 그런 면에서 작가들이 저를 통과했다고 느껴요. 빛이 프리즘 렌즈를 통과해 굴절하며 여러 색채를 보여주는 것처럼요. 인간의 소통이 다 그렇듯 어떤 번역도 완벽할 수 없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발견하고 재현한다고 믿어요.”

번역가는 작품 속 화자에게 목소리를 찾아주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영매”다. 그는 자신의 번역을 “체험 지향적”이라고 말한다. “좋은 번역은 원작 소설을 읽을 때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줘야죠. 텍스트가 숨죽이면 숨을 죽이고, 따뜻할 땐 따뜻하게 읽혀야겠죠.” 조너선 콧이 1978년 파리와 뉴욕에서 수전 손택을 인터뷰해 쓴 <수전 손택의 말>(마음산책, 2015)을 번역할 때는 당시 두 사람이 만난 그 여름 속 “사람의 육성”을 포착하는 게 목표였다. 조앤 디디온의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돌베개, 2021)에서 그가 포착한 글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분석적인 표면 아래 눅진하게 흐르는 다정함”이었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언어감각이 “낡아가나” 자문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살림, 2019)에서 ‘젖가슴’이란 낱말을 썼다 “불편하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인물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골라 썼던 단어인데, 그후로 더욱 조심하게 됐어요. 언어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를 밝히고 바로 세우는 작업은 정말 중요하지요. 다만 어휘를 검열하는 데 그치지 말고 맥락과 용례도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까 해요.” 시리 허스트베트의 ‘용례 바꾸기’ 작업에서 ‘그녀’(she)는 피해야 할 비하적 표현이 아니라 ‘그’(he)의 권위를 탈취하는 표현이 된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작업실이자 자택에서 만난 김선형 번역가.

세 살 때부터 책을 읽었던 활자중독 어린이는 공부를 잘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문학박사가 됐다. 그래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늘 제 안에 ‘구멍’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난해에야 그는 자신이 평생 겪어온 고통의 원인이 질병이란 걸 알았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았다. “이유 없이 집중이 안 되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들을 작업할 때는 초몰입 상태를 경험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영어가 자동으로 한국어로 줄줄 읽히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몰입에서 벗어나면 우울과 불안이 따랐어요. 그러다 보니 벼락치기 하면서 인생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일했는데, 3년 전부터는 컴퓨터 빈 화면을 보면 숨을 못 쉬고, 마감이 가까이 오면 공황이 왔어요. 빨래, 설거지, 시간 맞춰 약속 장소 나가기 같은 당연한 일상이 힘들었고요.” 장애가 부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온갖 분야에 호기심이 생겨서 들쑤시고 다녔는데, 번역에는 큰 도움이 됐어요.” 그가 이 이야기를 해준 까닭은 “비슷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이다.

치료와 병행해 생활과 작업의 ‘루틴’을 재건하는 그는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며 “내일이 오늘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가 “여성주의 비평의 신기원을 이룩한 에세이”라고 찬탄하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어머니들 아버지들 또 다른 사람들>을 번역하고 있고 제인 오스틴 전집도 내놓을 예정이다. “제인 오스틴은 결혼하지 않고 글로 독립했어요. 펜을 빼앗아 여자의 목소리로 장르를 창조한 진짜 중요한 작가죠. 저다운 번역을 해보고 싶어요. 처음부터 우리말로 쓴 것처럼.” 그에겐 병 탓에 장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게 어려워 미뤄뒀던, ‘작가’ 김선형으로 쓰고 싶은 책이 많다.

글·사진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

이런 책을 옮겼어요

도롱뇽과의 전쟁

변사처럼 변화무쌍하게, 수없이 목소리를 바꿔 가며 김선형 번역가가 한바탕 신나게 ‘공연’할 수 있었던 에스에프 걸작. 예술의 경지에 달한 편집과 디자인 덕분에 책꼴도 걸출하게 아름답다.

카렐 차페크 지음, 열린책들(2010)

내가 사랑했던 것

미술, 심리, 문학, 의학, 전방위 인문학자 허스트베트의 온갖 관심사들이 눈부신 스토리텔링으로 승화된 걸작. 아프고 쓸쓸하고 불안하고 복잡하며 아름다운 사람살이. 사랑과 예술과 글쓰기와 학제간 연구가 다층위로 어우러지는, 이토록 지적인 소설이라니.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뮤진트리(2013)

시녀 이야기 l 증언들

평범하고도 특출한 악과 혐오와 제도적 폭력을 꿰뚫는 통찰, 용기와 지성과 희망을 기어이 긍정하는 찬란한 서사의 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의 번역 사이에 긴 시간의 간극이 있고, 그새 낡아 버린 어휘와 표현을 전면 수정할 수는 없어, 김선형 번역가는 새 번역 작업과 최대한 맞춰가느라 고심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황금가지(2002 l 2020)

예술과 거짓말

경계를 가르는 학식과 깊은 사유가 떨리는 서정으로 유려한 언어로 펼쳐지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소설. 피카소가 여자라면? 사포의 작품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헨델이 현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날카로운 상상력으로 권력이 만든 질서에 균열을 낸다.

지넷 윈터슨 지음, 뮤진트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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