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돌아갈 수 없는 경계를 향한 상상
‘대청봉 수박밭’·‘리틀보이’ 등
정과리 문학평론가 111편 엮어
분단·상실·생명·고향 등 통찰
“판결 기다리는 심정으로 출간”
시가 먼 곳을 향해 날아간다. 한 번의 날갯짓으로 설악산 능선을 지나 동해의 수평선 너머로 지나간다. 불안으로부터의 탈출구인 그곳은 기존의 상징체계를 거부한다. 그의 시적 상상은 반시대적이면서도 무언가를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고형렬 시인의 첫 시선집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가 나왔다. 1985년 발표한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부터 2020년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까지 16권의 시집과 잡지에 발표한 1000여편의 시 중 111편을 정과리 문학평론가가 선별해 엮었다.
정 평론가는 “고형렬의 시 생애 전체를 압축하면서, 나는 그 모두를 풀이할 수 없다는 점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시집 전부보다도 양이 훨씬 많은 책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분명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7권 분량의 ‘에세이 장자’를 펴낼 만큼, 고형렬의 시 세계가 방대해졌고 흐름 또한 파격적으로 변해왔기 때문이다. 선집에 미처 수록하지 못한 시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오히려 새로운 시선으로 고형렬이라는 시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온다. 오래된 것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분단·노동·생태·환경 메시지까지 폭넓은 사유가 담긴 이번 시집은 낭송가 김성천의 목소리를 통해 ‘소리시집’으로도 발간됐다. 시인이 한참 전에 지나온 시간을 이제서야 겪는다.
정과리 평론가는 고형렬의 시가 1980년대 민중시와 동행하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풀이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소외 현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어떤 운동 이념이나 쏠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척력으로 보인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졌던 시 ‘1980년대에 살았는가’에서 “무엇을 하며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헤어져 살았는가”라고 표현이 이를 대표한다. 어쩌면 당시 서울의 모습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세계를 더욱 갈망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1954년 속초 사진리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출을 단행, 철저한 노동자로서 제주도 등을 떠돌았다. 20세 때 부친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속초로 돌아가 고성 현내면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1979년 시 ‘장자’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한·중·일 15명의 시인이 모인 국제 동인 ‘몬순’을 결성하는 등 시문학 발전에 기여해왔다.
1985년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이 출간됐을 때는 국가체제 전복 혐의로 광화문 대공분실에 연행됐다. 시 ‘백두산 안 간다’ 때문이었다. “원산에서 어물점을 차리고 있는 매제”가 “가을엔 백두산을 가자”고 전화를 했고, 평양의 숙부도 백두산에 가자고 전화를 건다. 시인은 “내가 거길 가느니 속초나 갔다 오겠다”고 생각하고 코웃음 친다. 물론 상상력이 가미된 글이지만 시인은 꼬박 이틀 밤에 걸쳐 시 해석을 쓰고 나서야 풀려나왔다고 한다. 1991년 출판사 창비에서 근무했을 당시에는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탄광촌으로 취재를 다녔는데, 간첩 혐의를 받아 안기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고형렬의 작품에서 분단의식은 중요한 상징이다. 작금의 현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쓸쓸한 현실의 벽 너머에 있는 아득한 미지의 행선지를 제시한다. 도달할 수 없는 곳, 생과 사의 경계와 함께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양양과 고성 등에서 연어 탐사를 진행하고 쓴 산문집 ‘은빛물고기’ 또한 언어와 분단 현실 등 경계를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기 위한 시도였다.
기계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모호성의 영역을 내버려 둔 채 읽어가길 권한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분열적인 시인의 정체성이야말로 이 시선집의 매력이다. 정과리 평론가는 “고형렬의 시가 쉽지 않은 것은 그의 지향이 복합적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 지향의 실천에 요구되는 지적·정서적 노동을 함께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속초’, ‘거진 생각’, ‘야동리 어린 모’, ‘강원도 백로밤’, ‘김상철 죽음’, ‘영랑 호수’, ‘외설악’ 등 고향에 기반한 시가 상당 분량 포함된 것을 보면 백두대간의 중심부인 설악산은 시인의 원체험이 담긴 장소이자 “조국”이다. 시인은 초기 시 ‘대청봉 수박밭’부터 원시의 싱싱한 생명력과 상상력을 그려왔다. 그러면서 ‘북설악’의 “그리운 옛날”은 “갈 수 없는 미래”로 표현한다. 시 ‘사진리 대설’에서는 8일간 눈이 내린 고향의 풍경을 두고 “거만하게 하늘로 솟았던/산이 순하디 순해져서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 되자 “그제야 사람 사는 마을이 되었다”고 묘사한다. 가족으로부터의 이탈과 상실, 회귀로 향하는 관념 또한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한 시대를 방황하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지만 감정의 폭발 대신 깊은 성찰을 통해 또 다른 무언가를 고민한다. 잃어버린 의식과 공허함을 찾는 과정이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참상을 다룬 장시 ‘리틀보이’도 수록됐다. 1987년 피폭자 김필례 씨를 만난 것을 계기로 1995년 출간된 작품이다. 그가 가진 장자 사상을 84편의 시로 펼친 장시 ‘붕새’의 일부도 포함됐다. 한 나라의 크기에 비견할 만큼 커다란 붕새는 “무차별의 진공 그 외계로 향하는” 중이다. 시인은 “혼돈의 기억”이 담긴 “염색체”를 알고 싶어 한다.
80년대 후반 쓰레기 매립장의 모습을 담은 ‘난지도 겨울’은 국내 생태시의 초기작으로 분류된다. 민주화의 열망이 강했던 시기, 시인은 생태적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거주지 인근의 난지도를 조사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심이기도 하다. “눈메뚜기의 침략”을 받고 아우성치는 시인은 “써서 뭣 할 것인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면 힘이 아니라면”이라고 표현하며 강한 어조를 내비친다.
시인의 말 ‘나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어느 시인의 문 앞에서’는 명문이다. 고형렬 시인은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멀리 있는 것 같아도 같은 시대 속에서 각자 자기의 것을 찾으며 살아왔다”고 글을 남겼다.
책 뒤편엔 린 장취안(중국), 피터 보일(호주), 마만. S. 마하야나(인도네시아), 마이 반 판(베트남) 등 해외 문인들의 추천사가 실려있다. 일본 시인 시바타 산키치는 “여기에 시인의 상상력의 최고봉이 있다”고 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평면의 지옥-고형렬
절망의 계단은 위로만 향해 있다
나선형 사다리 끝에서의 절규
자살하거나 견디거나 둘 중 하나
그 외의 존재 방식은 없다,
잠금장치는 서로 덜커덕덜커덕,
저 안쪽과 저 바깥쪽에서.
두 물질은 합금을 원치 않는다
역시 두 두뇌도 분리를 원한다
역시 무서운 입자와 파동
물질로 구성된 불행한 새가,
죽은 언어 속에 빠져 날갯짓한다
찥어진 날개의 천변만화는
기억이 없는 데옥시리보핵산의
나선형 사다리 끝에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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