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광석 제철지 ‘영광’ 일제수탈 ‘아픔’ 모두 역사교육으로”

전인수 2023. 3. 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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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백두대간 고대 제철유적 보존·발전 시급]
고대시대~근·현대 쇠부리터 대거 발견
동해·정선 등 쇠부산물더미 보존 ‘양호’
철기시대 대규모 집단 취락지·유물 발굴
조선 동국여지승람 등 ‘철광석 산지’ 입증
일제강점기 삼화동 중심 철광산 운영
철 수탈 사용한 철굴·소리개차 등 보존
동해지역 철기제철 축제·랜드마크 전무
추가 발굴·계승 필요 역사도시 재창출

국내 대표적인 석회암·철광석 지대로 알려진 강원 동해시 백두대간 일대에 고대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쇠부리터 등 방대한 분량의 제철유적이 발견되면서 이에대한 과학적인 전문 발굴조사와 함께 보존·발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동해시고대제철연구소(소장 최형준)는 동해시 삼화동(행정동) 상월산~달반니산~송미산~더받이령~무릉계곡~철산을 잇는 광범위한 구역에서 12기의 쇠부리터 흔적을 발견해 현장을 보존하고 있다. 이후 발굴조사가 이뤄지면 유적이 추가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전쟁준비를 위한 철 수탈 만행을 저지른 일제가 철광석을 제련하기 위해 건설한 삼화제철소

■ 동해 백두대간 제철유적

철광석을 채취, 제련하기 위해 100호가 넘는 철기마을이 형성된 이기동 쇳골을 중심으로 발달한 쇠부리터에서 생산된 선철을 재료로 무기·농기구 등 철기구를 만들기 위한 2~3차 제련소(대장간, 주철 과정) 7곳, 1~3차 제련시 철광석을 달구는 연료인 숯을 생산하는 ‘숯가마터’도 20여곳 발견됐다.

쇠부리터는 철광석을 달궈 선철을 분리해 철을 생산하던 곳으로 노(爐)의 높이는 1.5~2m 너비는 1.2~2m로 둥근 형태고, 노의 양쪽으로 2.5~6m 길이의 축대가 쌓여져 있다. 쇠부리터 주변에는 진흙으로 만들었던 노의 부서진 흔적, 철광석을 녹일 때 선철과 분리된 철찌꺼기인 슬래그, 타다 남은 숯 조각 등이 무수히 널려 있다. 또 노 시설과 철 부산물 등을 폐기하는 ‘수혈유구’로 추정되는 웅덩이도 여러곳 발견되고 있다.

▲ 일제가 철광석 운반을 위해 설치한 소리개차의 케이블에 걸려있는 운반함 모습.

정선군 임계면 군대마을과 부수베리 일대는 원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철광석지대와 제철유적이 많은데다 곳곳에 성의 흔적이 있고, 철기와 전쟁 관련 지명이 있다. 해발 200여m 언덕에 위치한 1000여㎡ 규모의 C지역 제철유적은 고로의 형체는 없으나 불 먹은 돌과 쇠똥더미가 방대하게 남아 있어 제1~3차 제철지로, 조선 이전의 유력한 구리 생산지였던 철장(鐵場, 철광산)으로 추정된다. 또 A지역 쇠부리터는 1600여㎡ 면적에 직경 약 1.2m, 깊이 약 1m 정도의 고로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이 곳에는 쇠부산물더미·토굴흔적·집터·노천광산·철광석더미가 있고, 여러개의 숯가마터도 현존하고 있다. 직경 1m 정도의 고로 흔적이 남아 있는 600여㎡ 규모의 B지역 쇠부리터는 집터가 있는데다 바닥이 쇠부산물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제철유적으로 가치가 큰 것으로 추정된다.

삼화동 백두대간 제철유적지 일대에서는 아직 시대를 단정하긴 어렵지만 철로 만든 말 편자, 칼, 칼을 갈 수 있는 휴대용 숫돌 등 원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다수 발견됐다. 더욱이 지난 2011년 제철유적지로부터 10~15㎞쯤 떨어진 송정동 374-1 등 41만여㎡ 구역에서 대규모 철기시대 집단 취락지가 발굴, 쇠삽날·쇠화살촉·은제장신구 등 철기류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면서 강원도기념물로 관리되고 있다. 동해지역에는 송정동 외에도 묵호·북평권에 7곳의 철기주거유적지가 있다.

▲ 일제가 철광석을 채광하기 위해 뚫은 철굴 모습.

■ 철기 역사

신라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지가동에 위치한 ‘지상사’에서도 주변에 널려있는 철광석을 채취해 자체 쇠부리터와 대장간을 운영하며 철불을 생산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두타산 백두대간 일대에서 철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효원(1532~1590년)이 선조 10년(1577년) 3월 두타산을 유람한 후 쓴 두타산 일기에 ‘거제사’라는 사찰이 등장한다.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 내 산기슭으로 난 옛길을 따라가면 개울가 오른쪽 비탈면에 거제사터가 있는데 지금도 철을 생산하던 흔적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척도호부의 서쪽 직점(부서직점·府西稷岾)에는 철소가 한 곳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삼척도호부에서 토공(공물로 바치는 토산물)으로 시우쇠(무쇠를 불려서 만든 쇠붙이의 하나)를 바쳤다’, 동국여지승람에 ‘삼척도호부 서쪽 직점에서 모시 철이 산출된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이 곳이 철광석 산지이자 제철지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 동해시 삼화동 백두대간에 있는 쇠부리터 흔적.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동해시 삼화동 내금곡·이기리를 중심으로 백두대간 일대에 철광산을 운영하면서 이 지역 주민을 동원해 수십 곳에 철굴을 뚫어 철광석을 채광, 선철을 뽑아내 묵호항 등을 통해 선박에 실어 일본으로 대량 수탈해 갔다. 일제의 철 수탈현장에는 철광산터·집터를 중심으로 철굴·소리개차·케이블카·기계장치·운전석 등의 일부가 다수 보존돼 있다. 철산(鐵山)이라는 산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노천에 널려있는 철광석을 채취해 철을 생산했던 이 일대에서 일제가 철을 채광하기 위해 뚫은 철굴이 현재까지 10여개 발견됐다. 특히 해발 400~900m 지점에는 야적장, 소리개차, 가시랑차 바퀴, 철길 교각 구조물 등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어 일제 만행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보존·관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지금의 효가동 부영·대동아파트 자리에 지난 1930년에 건설된 삼화제철은 해방후에도 1~8기의 고로를 운영, 연간 4만8000t의 철을 생산해 왔다. 지난 1971년 가동이 중단되면서 포스코가 삼화제철의 고로 8호기를 가져가 문화재로 등록해 역사관에 전시하고 있다. 동해 지역 제철역사의 증거물인 8호기를 되찾아오거나 실물과 같은 모형을 만들어 동해시에 전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1차 제철과정에서 나온 슬래그(쇠똥) 모습.

■ 보존 및 발전 방안 마련 필요성

동해시고대제철연구소는 삼화동이 석회석·철광석 지대고, 철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는데 주목해 삼국시대 전후를 중심으로 한 철기제철 연구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은 7명이 지난 1997년 발족했다. 그동안 동해시고대철연구소는 20년 넘게 각종 고문서, 역사자료, 제철관련 고서적 등 다량의 고대역사자료를 조사분석하며 수시로 탐사활동을 통해 1차 철 제련 장소 12곳을 발견했다.

이 지역을 보호망 설치 등을 통해 보존하고, 문화재청 또는 도 문화재연구소 등 전문기관이 나서 심층적인 추가 발굴조사와 관리방안을 수립하는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동해시고대제철연구소는 앞으로 철기유적에 대한 학술적·과학적 검증을 통해 체계적인 보존·관리·계승활동을 전개하고 동해시를 철기제철 역사문화도시로 재창출하기 위해 지속적인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 포스코에 전시된 삼화제철 고로 8호기 실제 모습.

최형준 동해시고대제철연구소장은 “삼화동에 철과 관련된 지명이 많고 역사서에 철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다수 있다”며 “송정동 등 8곳에 철기 집단주거지가 발굴 됐으면 반드시 근처에 철생산지가 있었을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 관련 기관들의 무관심으로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고대로부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해시임에도 지역의 뿌리 깊은 역사연구가 없었고, 역사에 바탕을 둔 차별화된 지역축제와 랜드마크가 없었다”며 “삼국시대 전후를 중심으로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철기제철 연구를 통해 역사를 재조명하고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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