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9개월 동안 뭐 하고 다시 의견 청취인가

김승범 사회정책부 차장 2023. 3. 17.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근로시간 유연화는 대선 공약
작년 6월 착수한 52시간제 개편
소통부족·전략부재로 반발 직면
노동개혁 불씨 꺼뜨리지 말아야

주(週)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자들의 과로를 막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문재인 정부가 2018년 도입했다. 하지만 경직되고 획일적인 적용 탓에 다변화하는 산업 구조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52시간제의 개편 필요성에 공감했다.

하지만 막상 정부가 지난주 개편안을 내놓자 거센 논란이 일었다. 정부 안은 바쁠 땐 한 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하고 다른 주에 몰아서 쉴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근무시간을 주당 52시간에 맞춰야 하던 것을 월·분기·반기·연(年) 단위로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부는 근로자의 근로시간 선택권이 넓어지고 실제 일하는 시간은 줄어든다고 했다. ‘한 달간 제주도 살기’ ‘주 4일 근무’도 가능해진다고 했다. 그런 정책이라면 근로자들이 반겨야 할 텐데 상황은 정반대다. 정부 노동 정책에 부정적인 한국노총·민주노총의 반발은 예상됐지만, 일반 직장인들까지 상당수 반대에 가세했다. 장시간 근무가 일상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세대)의 불만이 폭발했다.

정부가 역풍을 맞은 이유로는 우선 전략 부재를 들 수 있다. 새 규정대로라면 한 주에 69시간 근무할 경우 다른 주에는 40시간 일하거나 휴가를 가는 식으로 주 평균 근무시간을 52시간 밑으로 맞춰야 한다. 하지만 노동계는 69시간만 부각시켜 ‘주 69시간제’로 몰아갔다. 주 7일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일하는 극단적 가정을 토대로 주 80시간 이상 일하게 된다고도 했다. 이 같은 노동계 주장이 SNS 등을 통해 퍼져 나가는데도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정부는 선택지를 늘린다면서 출퇴근 사이 11시간 의무 휴식제를 선택 조항으로 바꿨다. 그러자 주 90시간 근무가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개편안 자체에도 아쉬운 대목이 있다. 산업재해와 과로의 연관성을 인정하는 기준 근무시간은 4주 평균 64시간이다. 그런데 정부 개편안은 주당 근무시간 상한선을 69시간으로 설정했다. ‘과로를 조장한다’는 말을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통 부족도 문제다. 개편안에 반대하는 근로자들은 ‘제도와 현실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지금도 공짜 야근을 많이 하는데 제도가 바뀌면 회사가 대놓고 야근을 더 자주 시키고, 결국 일은 일대로 하면서 돈은 못 받는 게 아니냐고 우려한다. “연차 휴가도 다 못 쓰는데 한 달 휴가가 가능하겠느냐”고 하소연한다. MZ세대 몇 사람만 붙잡고 얘기해도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개편 논의가 전문가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현장 근로자의 의견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근로시간 유연화는 윤석열 대통령 대선 공약이다. 주 52시간제 개편안은 정부의 노동 개혁 1호 법안이다. 하지만 누더기가 될 판이다. 윤 대통령은 개편안이 발표되고 나서 8일 만에 보완을 지시했다.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도 했다. 개편안을 수정하면 경영계가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근로자들이 만족할지도 미지수다. 정부는 작년 6월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보완할 점이 없는지, 예상되는 반발은 무엇인지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의견을 청취하겠다고 한다. 한 번 뒤집힌 정책은 그만큼 신뢰를 잃는다. 정부가 노조의 회계 투명성 강화 조치와 불법행위 근절 대책 등 일부 결과물을 내놓긴 했지만 노동 개혁은 가시밭길이다. 야당에 의석 수에서 밀리고, 개혁에 동참해야 할 노조는 정부를 외면하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가 개혁 불씨를 스스로 꺼뜨리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