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기자 2023. 3. 1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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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집권당과 내각에서 뜬금없이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하는 일이 잦다. 노동자의 휴식권과 안전권을 무력화하는 장시간 노동의 물꼬를 여는 노동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이는 절차로 노사정 협의가 아닌 전문가 중심의 자문기구를 중심으로 삼으면서 뜬금없이 노무현 정부의 방식이라고 정당화했다. 국민들 다수가 반대하는 일본 전범기업의 강제동원 배상문제에 대한 ‘정신승리식’ 해법에도 노무현 어록을 소환하기도 했다. 전당대회가 대통령의 대표 지명대회로 전락했다는 비판에도 노무현도 그랬다면서 시대착오적인 당정일체론을 강변하기도 했다. 전체적 맥락이나 배경은 거두절미한 채 평소에는 제대로 존중하지도 않던 이전 정부와 대통령을 여론을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것은 속절없이 순진한 국민들의 시선을 흩트려서 당장의 위기만 모면해 보려는 얄팍한 정략적 술수에 불과하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사건건 국민 다수의 뜻을 거슬러 민주화의 역사를 퇴행시키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의 자긍심을 깔아뭉개는 정책을 막무가내로 펼칠 때 정작 소환되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내건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구호이다.

이 구호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원리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곰곰이 곱씹어 본다면 많은 것이 함축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에도 제왕에 비유되는 최고국가권력의 상징이다. 그 대통령이 선출된 공무원인 ‘아무개’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라는 선언은 대통령직을 편견과 아집과 정략에 휘둘리기 쉬운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나라를 위해 봉사의 기회를 준 국민의 의지와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 수행하겠다는 겸손과 절제의 공화정신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정책이나 한·일관계나, 당정일체론이나 모두 다 ‘나’의 결단이 아니라 ‘우리’의 결의여야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일 수 있음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우리의 일차원적 구별이 곧 구체적인 특정 국가정책의 방향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국민주권의 대원칙은 주권자인 국민은 한 사람의 자연인이 곧 주권자인 군주국과는 달리 단독행위자로 실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단일한 의사를 가지고 법이 부여한 권한을 일관되게 행사하는 현실적인 단일체가 아닌 것이다. 국민은 다양한 생활세계에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생활인들의 추상적 통일체로 헌법에 의해 의제될 뿐이다. 국민들이 개개의 양심에 따라 주관을 가지다 보니 모두가 동의하는 정책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 됨을 강조하는 ‘총화’나 ‘통합’의 이상은 다원적인 정치현실에 필연적인 갑론을박, 백가쟁명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고 외면하려는 선동적 구호에 불과하다.

결국 각양각색인 국민을 ‘우리 대한국민’으로 묶어 주는 민주공화국의 블랙박스는 바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협하는 대의와 협치의 과정이다. 다양성과 다원성을 실체로 하는 개인으로서의 국민을 허구적인 상상의 통일체로 묶어두기보다 그때그때 구체적인 현안을 두고 무엇이 우리 공동체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해 줄 수 있을지를 의논하고 협의하면서 실사구시적인 실용적 합의를 헌법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도출하도록 공론을 허용해야 한다.

대화나 타협은커녕 헌법이 보장하는 단결권이 무색하게 노사관계의 중요한 당사자를 ‘노폭’이라는 사회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얼렁뚱땅 근로조건의 근간을 바꾸려는 접근은 근로조건의 결정에는 인간의 존엄을 특별히 더 강조하고 노사당사자의 자율성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는 헌법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사실인정과 진정 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의 정당한 호소와 이를 기꺼이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폄하하면서 실체도 불분명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복원에만 매달리는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은 국민을 대통령으로 삼기보다는 통치의 대상으로 폄하하고 권력분립의 헌법원칙을 훼손하는 반민주공화적 행태이다.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쉬운 과제가 아니란 걸 모르지 않는다. 쉽지 않기 때문에 수천만명이 참여하여 직접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게 아닌가? 주어진 권력이라고 조자룡 헌 칼 쓰듯이 막무가내로 쓰지 말고, 제발, 가장 기본적인 헌법원칙이라도 잘 지켜주길 바라는 게 주권자 국민을 구성하는 모든 국민들의 작은 바람이 아닐까.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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