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어느 따뜻한 봄날
따스한 봄날 한 폭 끊어 강원도 간다. 바야흐로 후끈한 봄기운 타고 네 바퀴 굴리며 최대한 천천히 빠르게 간다. 충청이나 전라로 가는 길이 벌어지는 꽃잎 따라 미끄러져 나아가는 느낌이라면 강원은 사뭇 다르다. 낯익은 고개, 좁아지는 골목, 그 막다른 곳의 사립문, 손바닥 화단 옆 거름 자리, 외양간 지나 고방, 섬돌 돌아들어 초가 ‘뒤안’의 울울한 한 꽃송이, 그 꽃잎 속 암술과 수술을 헤치고 씨방으로 점점 수렴되는 듯하다. 이게 바로 강원도의 힘!
오대산 월정사 입구의 시원한 식당에 도착했다. 수육, 메밀전병에 막국수. 밑반찬을 차려주는 상냥한 분께 앞접시를 좀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접시는 아니 오고 젊은 사장님이 오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부탁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실은 아까 그 종업원이 외국인이라서요.
막국수는 훌륭했다. 삶은 돼지고기는 쫄깃하고, 메밀전병은 그야말로 ‘겉바속촉’의 모범이다. 허겁지겁 한 입 먹고 창밖의 들판을 보는데 몰려오는 한 생각. 나야 이곳을 잘 알고 아침에 출발해서 여기에 왔다. 가까이에 있는 선재길도 여러 번 걸었다. 삿된 이라면 구사하지 못할 것 같은 강원도 사투리의 매력은 또 어떤가. 이 아릿한 봄날, 꿈속에라도 오고 싶은 곳이 아닌가.
저 일하는 분은 이곳에 처음 도착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한편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한국에 온 목적이야 분명할 터이다. 숱한 고비 끝에 공항을 통과하고, 골목들을 지나고, 여러 문을 닫으며, 고향에서 아주 더 멀어진 곳까지 온 심경이 헤아려지는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왔는데, 떠나온 곳과 비슷한 지역이라 여기며 내심 당황한 건 아닐까, 뭐 그런 괜한 짐작. 본인이 알게 된다면 외려 불쾌하게 여길지도 모를 나의 쓸데없는 오지랖.
수육에는 새우젓이 딱이다. 주방에 가서 좀 더 달라며 그이와 슬쩍 눈을 맞추었다. 따뜻한 곳에서 따스한 대우를 받는 듯 엷은 미소가 지금의 사정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새우는 바다에서 강원도 내륙의 이 산촌까지 왔다. 새우는 아무리 작아도 그 태도를 잃지 않고, 젓갈로 변신해도 그 새카만 눈을 그대로 달고 있다. 수육과 새우젓에 물막국수. 특별하게 따뜻했던 그 어느 황홀한 봄날.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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