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가문비나무 아래, 손글씨를

기자 2023. 3. 1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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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편지가 있었다.

친구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연인으로부터 형으로부터.

우표가 붙어 있었고

손으로 쓴 내 이름이 있었고

가슴 설레며 봉투를 열었고

혼자 읽고 싶어 옷 속에 감추고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은 아파트관리비 청구서, 수도요금 고지서,

백화점 카탈로그, 신용카드 명세서,

구독 신청한 적 없는 잡지와 신문들.

절반은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나도 손글씨 편지 보낼 곳이 없다.

-시 ‘손글씨 편지’ 서홍관, 시집 <우산이 없어도 좋았다>

김해자 시인

장래 희망으로 ‘원예사’라 쓰고, 호수 옆에 나무집과 수선화까지 몇 포기 그리다, “아나, 농부가 좋것다”, 담임선생님한테 꿀밤을 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고등학교 때는 서점을 하는 게 꿈이었다. 내가 운영할 서점 옆에 꽃집을 하겠다는 친구와 그 옆에 찻집과 빵집을 겸하겠다는 친구도 나섰다. 돈 벌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 무능하고 꿈만 많은 너희들에게 돈을 대겠다는 친구도 생겨났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서야, 열일곱 살 때 우리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공간을 만나게 되었다. ‘가문비나무아래’라는 서점이었다. 따뜻한 카펫 위에서 강아지와 아이가 놀고, 한쪽에선 김밥과 음료수를 나눠 먹으며 어른들이 대화하고, 뒹굴뒹굴 놀다 책에 가끔 눈을 두는, 아이의 꿈에 젖은 듯한 눈동자에 어릴 적 내 소망이 오버랩되었다.

지인들에게 좋은 서점이란 말은 들었지만, 직접 가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솔직히 많이 놀랐다. 경이에 가까운 감동이었다고 할까. 서점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편하고 우아하기까지 했다. 책이 꽤 많은데도 빽빽하다거나 답답하단 느낌이 없는 건 책장과 책장 사이에 여백이 존재해서겠다. 각자 개성을 뽐내는 책들 앞에, 손글씨로 쓴 메모들이 붙어 있어서기도 했겠다.

손글씨가 가리키는 책들은 “아파트관리비 청구서, 수도요금 고지서”나 “백화점 카탈로그, 신용카드 명세서” 같은 일회용 책자가 아니었다. “구독 신청한 적 없는 잡지와 신문들”처럼, “절반은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타율적 인쇄물도 아니었다. 책들은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며,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하나가 된 그곳에서는 시 쓰듯, 정성스럽게 손글씨 편지도 쓸 듯했다.

가문비나무 아래에서, 편안히 책 읽는 인간 중심의 상상을 하고 있던 나는, 게시판에 붙은 손글씨를 읽고서야 알았다. ‘아래’가 ‘나무의 살 아래’임을. 그러니까 아래는 살이자 속이라는 것을. 교사 출신 젊은 책방지기들은 책이 “나무의 살을 발라서 나”왔으며, “나무의 살에 새겨진 사람의 삶과 꿈”이 만나기를 꿈꾸었다는 것을. “나무의 살과 사람의 삶이 만나 이루어진” 책에 대한 경의를 담아 ‘가문비나무아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을.

북콘서트에는 책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왔다. 승마장과 천안아산신문사에서 일하고, 천안민주화기념사회와 깨어있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예산과 목천에서 농사짓고 근처에서 건축설계 일을 하는 젊은이도 왔다. 심지어 대학 때 친구 동생까지 와서 얼싸안았다.

행사가 끝나고 서점 한쪽에서 술 한잔 나누며 아우내 장터의 순댓국밥과 3·1운동과 유관순을 떠올리며, 빼앗긴 태극기를 되찾아오자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결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얘기들을 맘 터놓고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감사한가. 50여개 촛불이 동시에 켜지는 것 같았으니.

서점에 다녀온 지 며칠 후, 우리 동네 이종관씨가 부탁을 해왔다. 언제 그 서점 가거든 약초 나오는 책이랑, 나무 키우고 전지하는 법 나오는 책 좀 사다 달라고. 그러마고 했다. 며칠 후 서점에 가서 우듬지 회원으로 가입할 생각이었으니. 설레며 갈 데가 생겼다. 회비 5만원 내면 책 2권과 음료 쿠폰 10장 받는단다.

우듬지와 그루터기와 가지와 잎이 모여 그늘을 드리운 사람의 숲에서, 사람도 만나고 차 마시며 책도 보고, 가끔 음악회나 북클럽도 참여할 수 있으니 거의 공짜 아닌가. 물처럼 공기처럼 귀한 것들은 모두 거저가 아니던가.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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