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침공도 막았던 스위스 은행의 굴욕[만물상]

김홍수 논설위원 2023. 3. 1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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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크레디스위스 은행이 파산설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스위스 베른시에 있는 크레디스위스 지점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는 독일의 침공을 피할 수 있었다. 40만 스위스 민병대의 결사 항전 의지도 한몫했지만 더 결정적인 전쟁 억제력은 스위스 돈 ‘프랑’과 스위스 은행이었다. 무역 결제에서 마르크, 달러를 쓸 수 없었던 독일은 석유 등 전쟁 물자를 구입하려면 스위스 프랑이 꼭 필요했다. 스위스 프랑 결제는 UBS, 크레디스위스(CS) 같은 스위스 은행의 국제 결제망이 있기에 가능했다.

▶스위스가 은행 강국이 된 비결은 신용과 비밀주의에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스위스 용병 786명은 루이 16세를 지키다 전원 전사했다. ‘스위스 용병은 계약을 죽어도 지킨다’는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교황도 스위스 용병을 경호원으로 썼다. 이런 신뢰가 자본이 돼 스위스 은행업을 키웠다. 비밀주의란 누구든 돈만 갖고 오면 출처도 이름도 묻지 않고 계좌를 열어주는 것이다. 한 스위스 은행가는 “고객이 ‘내 이름은 헤네시(술 이름)입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군요. 여기 30만달러가 있습니다’라고 하면 이름 없는 계좌를 열어준다”고 했다. 스와치 시계 창업자는 “스위스의 위대한 가치는 난민에게 ‘돈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2차 대전 중 유럽 유대인 부자들이 스위스 은행에 재산을 맡겼다. 나치 간부들도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맡겼다.

▶1998년 홀로코스트 희생자 유족들이 UBS, CS를 상대로 예금 반환 소송을 걸어 12억5000만달러를 돌려받았다. 철옹성 같던 비밀주의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2008년엔 미국 국세청의 압박에 굴복해 UBS가 미국인 고객 명단을 넘겨주고 벌금 7억8000만달러를 자진 납부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똘똘 뭉쳐 압박하자, 스위스 정부가 무릎을 꿇었다. 스위스 은행이 EU 고객에게 지급하는 이자에 대해 35%의 세금을 원천징수하고, 이 세금의 75%를 해당국 정부에 송금해 주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스위스 은행의 불패 신화를 깼다. 1위 은행 UBS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다. 정부의 구제금융 덕에 겨우 회생했다. 이번엔 미국 SVB 파산 사태가 5700억달러 자산을 가진 스위스 2위 은행 CS를 궁지로 몰고 있다.

▶CS는 2019년 미국 헤지펀드에 투자했다가 70억달러를 날린 이후 유동성 위기에 시달려 왔다. 작년 4분기 이후 예금이 150조원이나 빠져나갔다. 예금 인출 사태와 주가 폭락이 이어지자 스위스 정부가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망하게 두기에도, 살리기에도 너무 크다”(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게 걸림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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