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노인이 연필로 눌러적은 다짐 "주어진 삶, 바른대로 살으리" ['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조용철 2023. 3. 1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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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헬스
(19) 어느 시인의 장수비급
기침명(起寢銘)
정소파
자리서 일어남과 여섯시 시계 소리... 어쩌면 그렇게도 딱 맞추어 치는겐가
버릇은 하나의 기계 나도 몰래 놀랐다... 아침엔 무얼하며 저녁나절 무엇하나
일정한 하루 일과 알맞게 가려 놓고 그대로 실행하고 몸고르기 알맞다
인생 오래 살고 보니 더 살기도 쑥스럽다
하지만 주어진 삶 거부함도 우서웁다
오늘도 주어진 삶 바른대로 살으리
특정 분야에서 전문인의 탄생 100주년을 축하하는 특별 행사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2012년 대산문화재단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인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해 시인 백석, 설정식, 김용호, 이호우, 정소파 등이 축하를 받았다. 이중에서 정소파(1912~2013)는 당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930년에 이미 '개벽'지에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시로 등단했고 이후 교직에 봉사하며 후학을 키우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현대시조의 거장이었으며 호남 시조문단의 반석이었다. 광주 봉선동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책과 원고가 가득한 서재에서 필자를 맞아주었다. 여전히 독서와 작품 활동에 여념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의 일상활동은 전형적인 건강장수의 생활 패턴이었다. 무엇보다도 일상이 정밀한 시계처럼 규칙적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식사하고 점심 후에는 정기적으로 두 시간씩 동네를 산책했다.

면담 도중에도 산보 시간이 되었다며 일어서기에 같이 동행하면서 대담을 지속했다. 산보 후 집에 돌아오면 일정시간 휴식한 다음 다시 독서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가족들은 선생님이 백살이 넘었어도 이전과 전혀 달라짐이 없다고 말했다. 마침 서재의 책상 위에 백지에 연필로 적어둔 시조가 있어 양해를 받고 복사를 해두었다.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은 시조이지만 읽으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침명(起寢銘)' 정소파, 2012년 4월 3일. "자리서 일어남과 여섯시 시계 소리 / 어쩌면 그렇게도 딱 맞추어 치는겐가 / 버릇은 하나의 기계 나도 몰래 놀랐다 // 아침엔 무얼하며 저녁나절 무엇하나 / 일정한 하루 일과 알맞게 가려 놓고 / 그대로 실행하고 몸고르기 알맞다 // 인생 오래 살고 보니 더 살기도 쑥스럽다 / 하지만 주어진 삶 거부함도 우서웁다 / 오늘도 주어진 삶 바른대로 살으리."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아침에 일어나면서 하루의 생활을 스스로 다짐하는 내용의 시조다. 엄격한 시조의 율격을 따르면서 자신의 일상생활을 아침 낮 저녁의 3장으로 나누어 진솔하게 표현해 둔 내용이었다.

제1장의 주제는 생활의 규칙성과 지속성이다. 아침 일어나면서부터 규칙적인 일상은 습관화되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을 규칙적으로 살아왔다는 증거다. 규칙적인 삶은 생의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변함없이 지속적인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끝까지 추진해 생명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일이다.

순자집해 권학편에 '공재불사(功在不舍)'라는 가르침이 있다. 포기하지 않아야 공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기를 극력 권장하는 귀절이다. 생명에는 쉼이 없다. 포기가 없다. 젊든 아무리 나이가 들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체를 구성하는 모든 조직과 세포 그리고 분자들이 모두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스스로 강해져서 쉬지 않고 살아가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삶이 생명의 본질이다. 이러한 생활습관은 거의 모든 장수인의 공통적인 특성이 아닐 수 없다. 백살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태도야말로 건강장수의 핵심이며 거룩한 나이듦의 여정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2장의 주제는 삶의 계획성과 적절성이다. 백살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하루의 삶을 막연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획하며 찾아가는 모습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찾아가는 실천적인 모습과 일에 대한 적절한 배분은 건강한 생활의 상징이 아닐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적극적인 생활 태도는 바로 목적을 가진 삶의 모습이다.

건강장수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블루존프로젝트라는 생활습관 개조운동의 행동강령인 '파워나인(Power 9)'의 항목에도 '목적있는 삶(Purpose)'이 들어있다. 장수지역 주민들이 일상에서 무작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 건강장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생활에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늙었다는 이유가 하루하루의 삶을 무의미하게 막연하게 피동적으로 살아도 된다는 명분이 될 수 없다. 일부 나이든 사람들이 목적없이 방황하고 지내는 태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시인은 백살이 넘었어도 여전히 오늘도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이를 적절하게 추진한 다음에 여유가 있으면 운동을 해 몸을 고르는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가는 사람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之人也 物莫之傷)'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제3장에서는 자아반성과 도전정신과 삶을 수용하는 자세가 주제다. 장수로 인해 주위 가족들을 수고롭게 하여 미안하다는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용기와 자신감을 표출하는 마음가짐은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백살의 나이에도 자기반성을 통해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새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마음으로 생명존중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참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誠之者 人之道也) 경지이며 인간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이유다. 백살이라는 나이가 완성된 종말이 아니며 여전히 새로움을 찾아 자람을 이어나갈 수 있음을 엄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살이 넘은 시조시인을 만날 때는 문인으로서 다른 백세인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이 있었다. 그런데 백살이 된 정소파 시인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실천한 일들을 시조 한 수에 압축해 문학적으로 표현해 두고 있었다. 백세 시인이 절제해 표현한 시조 자체가 바로 건강장수의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일상에서 지켜야 할 생활의 규칙성, 지속성, 계획성, 적절성, 자기반성, 도전정신과 생명수용의 내용은 마치 수천년 비장되었던 비밀창고에서 찾아낸 건강장수의 비급인 것 같은 기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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