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젠더 격차는 과학계 아킬레스건”...출산·육아 기간 집중 지원 필요해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노벨상에 필적할 연구 성과를 내는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출산과 육아 시기에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왔다.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15일 경기도 성남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한국 여성과학자의 노벨상 수상은 요원한가’를 주제로 열린 제207회 한림원탁토론회에서 “전체 노벨과학상 수상자 644명 중 여성 수상자는 25명에 머물고 있다”며 “이 같은 노벨상 수상자 남녀 격차가 과학계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과학기술인의 수월성 발현과 과학계 다양성 추구를 위한 정책들은 단순히 개인의 경력 문제가 아닌 인재 확보 경쟁에서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필수요건이 되고 있다. 하지만 노벨상을 비롯한 국내외 주요 과학상은 대부분 남성 과학자들이 수상하고 있고 출산과 육아 문제는 여성 과학도의 진출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계속해서 남아 있다.
김 교수는 경력 단절 위기를 겪는 젊은 여성과학기술자들이 롤 모델을 찾고 문제를 찾을 수 있도록 과학계 네트워크를 통해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이어 두번째 기조발제자로 나선 김정선 동서대 바이오헬스융합대학 교수 겸 총괄부총장은 여성과학자들이 출산 후 전문직을 얻을 기회가 남성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며 가정과 연구의 양립을 위해 연구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회는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겪는 출산과 육아에 따른 경력 단절과 직장 내 젠더 장벽 문제를 해결하고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는 데 필요한 환경 조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 “노벨상의 젠더 격차는 과학계의 아킬레스건”
첫 번째 기조발제를 맡은 김소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는 ‘노벨상과 여성과학자의 거리재기’를 주제로 노벨상의 젠더 격차 문제를 지적했다. 1901년부터 2022년까지 노벨 과학상에 해당하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수상자 전체 644명 중 여성은 각각 25명으로 3.9%의 비율을 차지했다. 여성 수상자는 2000년대 들어서 절반 정도로 증가하고 2010년대에는 매해 여성과학자 수상자가 배출되었으나 여전히 노벨상 역사 전체에선 낮은 비율을 보인 셈이다.
김 교수는 과학자들끼리 주고받는 말에서도 젠더 편중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DNA 이중나선 발견으로 1962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은 ‘여성이 있으면 연구가 더 재미있지만 효과가 떨어진다’고 말했다”며 “매우 황당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2001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팀 헌트 역시 ‘연구실에 여학생이 있으면 네가 사랑에 빠지거나, 여학생이 사랑에 빠지거나, 비판받아 여학생은 우는 등 세 가지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비슷한 업적을 쌓아도 여성 과학자가 남성 과학자에 비해 과소평가되고 역사에서 잊혀지는 현상인 ‘마틸다 효과’의 문제점을 들었다.
김 교수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사용하는 시간도 여성이 현저히 적고, 사용 신청자가 익명일 경우에는 여성과학자의 연구 승인 확률이 18%에서 30%로 증가한다”며 “젠더 격차를 만드는 무의식적인 현상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젠더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과 한국과학상, 한국공학상 수상자 비율을 따져보니 여성 수상자의 비율은 각각 2.6%와 3.4%, 0%로 세 개 상을 합쳐도 여성 수상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노벨상 수상자의 여성 비율보다도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노벨상과 국내 과학상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젠더 격차는 독창성을 유지하며 열정적으로 연구할 시기를 놓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공학한림원과 미국과학한림원, 미국의학한림원이 2020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자연과학 분야에서 박사후연구원의 여성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박사후연구원은 20대후반부터 30대가 주를 이루는데 이 기간에 향후 노벨상을 수상할 결정적 연구 성과를 낸다.
김 교수는 국내 과학계의 네트워크가 연구를 많이, 잘 하는 연구자에게 쏠려있는 만큼 여성과학자를 포함해 더 많은 사람에게 지원을 넓혀야 한다며 정책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실제로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미생물학과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학과 내 유일한 여성 교수를 발견하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롤모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이미 해결방법 나와있어... 중요한 것은 ‘어떻게’ 환경을 바꿀지에 달려”
세계여성과학기술인네트워크(INWES) 회장인 김정선 동서대 바이오헬스융합대학 교수 겸 총괄부총장은 두 번째 기조발제자로 참여해 국내외 젠더 격차 현황과 원인을 분석했다. 김 교수는 “과학계 여성과학자 이탈은 남성 중심의 문화와 환경으로 인한 것”이라며 “더이상 성평등 정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다양성과 포용 정책으로 과학계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여성과학자 이탈 문제는 한국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나타난다며 발제를 이어갔다. 김 교수는 “선진국에서는 학부 졸업 이후 전문직으로 갈수록 여성 비율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며 “해외에서는 이공계에 100명의 여성이 입학하면 그중 12명이 대학원에 진학하며 단 3명만이 학계에 남는다고 표현하는데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젠더 평등이 강조될수록 여학생들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선호도는 크게 감소하는 ‘젠더 평등 역설’을 예로 들었다. 김 교수는 “이대로라면 여성의 과학계 진출은 갈수록 줄어들 수 있다”며 “STEM 분야의 여성과학자 수를 늘리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INWES와 같은 여성과학기술인들의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INWES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을 확대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비영리 국제 네트워크 기구로 2002년 창설됐다. 김 교수는 “네트워크 내에서 서로 과학 연구를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연구문화를 바꿔 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여성과학자들이 겪는 공통된 어려움도 소개했다. 출산 후 전문직을 얻을 기회가 남성의 3분의 1인 것과 연구와 가정 양립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연구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명 ‘과학자 엄마’들이 연구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연구비를 지원하고 육아 중인 부모 과학자에게는 유연한 규정을 둬야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이제는 여성을 바꾸기보다는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는 움직임이 많아졌다”며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된 현황 파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해외 사례 참고해야... 출산, 육아 시기 지원 시급
이날 이어진 토론에서 이공주 이화여대 약학과 명예석좌교수는 “여성과학자를 위한 정책을 제안할까 했지만 과학 문화가 더 중요한 것 같다”며 “경제는 발전하지만 젠더 격차가 더 심해진 만큼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여성이 역량을 펼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 경쟁을 한다기보다는 기반을 함께 쌓아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고 밝혔다.
김용연 국립암센터 연구소 최고연구원은 출산과 육아로 5년 동안 연구 공백이 있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밝혔다. 김 최고연구원은 “앞선 기조 발제를 들으며 여성 과학자의 미래에 대한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며 “외국에 머물 때 한국은 여성과학자를 잘 키워주지 않고 자리잡기도 힘들다고 들었지만 사춘기 두 아이를 두고 50세 넘어 박사과정을 시작한 동료를 본보기로 삼았다”고 말했다.
김 최고연구원은 “여성과학자로서 경험을 나누며 성공 사례를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며 “박사과정이라 박사후연구원 중인 여성과학자의 이탈은 과학계의 큰 손실로 이를 막기 위해 생애주기에 따라 지원 제도와 과학자 간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영조 단국대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석좌교수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카롤린스카대에서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 교수는 “최근 일본이 많은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에는 네트워킹 구축 전략이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며 “전세계적인 연구 네트워크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여성과학자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해외의 출산, 육아 지원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며 “유럽연합(EU)는 18개월의 출산 휴가를 주며 영국은 6개월치 임금을 전액 지급하고 출산당 논문 0.5편을 제출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연구비를 지원하고 정년 보장과 승진에서 많은 배려를 하는 제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희정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CL) 경영대 혁신 창업 조교수도 “연구 프로젝트를 리드하고 과학자로서 중요한 도약을 하는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 정년 심사 기준이나 육아 휴직, 휴직 후 지원 등 재정 및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ICL은 여성 과학자가 휴직에서 돌아온 뒤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바 있다”고 말했다. 또 정 교수는 “우수성 있는 여성 과학자의 성과와 잠재력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우수 과학자에 대한 표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여성 과학자 스스로도 연구 지원 프로그램에 더 자주 지원하고 전문성을 확실히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미래인재정책과장은 “양성평등법처럼 젠더 차별을 줄이기 위한 법적 체계는 마련되어 있으나 많이 바뀌지는 않았다”며 “여성과학자 경력단절의 중요한 이유는 육아 때문으로 상당 부분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과장은 “경력 초기만큼 중간 단계의 여성과학자의 지원도 중요하다”며 “정책 과제들을 발굴해서 실제로 반영할 수 있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여성과학기술인보다는 여성에 대한 지원 정책이 차이 만들어”
이날 토론에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는 공교롭게도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여성과학자 마리 퀴리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마리 퀴리는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8년 뒤인 1911년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김소영 교수는 ‘마리 퀴리를 벤치마킹해 국내 발명 연구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당시만 해도 노벨상을 두 번 받아도 프랑스 과학한림원 회원에는 탈락할 정도로 노벨상 권위는 지금과는 달랐다”며 “마리 퀴리처럼 과학자 한 명이 고군분투해서 과학 성과를 내는 시스템은 피해야겠지만 한 번 생각해볼만 한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용연 연구원은 ‘여성과학자들이 노벨상을 목표로 하려면 마리 퀴리의 어떤 모습을 본받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자신을 연구에 헌신하는 열정과 젠더 차별에도 포기하지 않는 실행력, 다른 연구자와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성 편견에 대해 참지 않고 대안을 찾아나섰던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과학기술보좌관을 맡았던 이공주 교수는 ‘국내 여성과학자 양성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2002년부터 여성과학기술인 지원과 육성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공립대학과 출연연에서 여성 채용 목표제를 만들어 여성 채용 비율이 30%에 거의 근접했다”며 “공학 분야에서는 5% 이내로 낮지만 중견과제에서 여성 과학자의 비율이 10% 증가했다”고 말했다.
김유식 과장은 ‘국가별 여성과학인 지원제도의 차이가 노벨상 수상과 같은 과학 분야로의 사회진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묻는 질문에 “여성과학기술인보다는 여성에 대한 지원 정책이 근본적인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며 “과학계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 이들이 중견 리더급으로 성장하는 시기가 되면 지금과는 다른 시스템으로 발전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욱준 한림원 원장은 “과학기술계에 다양성 확보를 위해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각종 지원과 경력 단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핀셋 정책’은 부족하다”며 “여성과학자가 겪는 어려움과 환경을 분석하고 논의하고자 토론회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날 토론회는 한림원 공식 유튜브채널을 통해서 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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