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버케이션’…구례에선 ‘북케이션’

강석봉 기자 2023. 3. 16.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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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헌책방지기 김종훈 대표 인터뷰
러브호텔, 사랑방으로 변신
섬진강 변 15만 권 헌책방 ‘섬진강책사랑방’
섬진강책사랑방 김종훈 대표.



눈에 펼쳐지는 것은 진경산수가 아니다. 코끝을 자극하는 것은 봄 향기의 향긋함이 아니다. 갑갑할 정도로 책꽂이를 가득 메운 헌 책들과 메케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세월의 더께를 마주하게 되는 곳이다. 봄꽃 여행의 절대 강자, 전남 구례에서 만난 곳은 모텔에 걸린 간판마저 뜬금없는 ‘책 사랑방’이다.

KTX 구례구역 건너편 구례읍 신월리 섬진강 변에 있는 헌책방 ‘섬진강책사랑방’은 3층짜리 모텔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 이곳에는 약 15만 권의 책이 진열돼 있다. 서점 규모로는 전국적으로도 손에 꼽힐 정도다.

1층은 건축, 미술, 연극 등 예술 서적과 한국학, 종교, 어린이 관련 서적이 있다. 더불어 북카페가 운영된다. 2층은 문학, 역사, 수필 등 교양서가 있고, 3층엔 전문 서적이 있다. 2층에선 섬진강의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책방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는 김종훈 대표다. 김 대표는 애초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대우서점을 운영했다. 김 대표는 스물여섯 살이던 1978년부터 헌책방 주인의 삶을 살았다.

40년 넘게 헌책방을 운영하던 보수동을 떠난 이유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책 때문이다. 익숙한 헌책방의 모습은 켜켜이 쌓인 책이다. 보수동에서 김 대표가 운영하던 대우서점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 공간은 비용이다. 그렇다고 책 한 권이라도 허투루 내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 책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새로 자리 잡은 곳이 이곳이다. 그때가 2020년 3월이다. 김 대표는 이에 대해 “책들이 불쌍해서 이곳으로 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불쌍한 일은 그해 8월 벌어졌다. 수해로 섬진강이 넘친 것이다. 이 일로 십수만 권의 책을 잃었다. 기막힌 것은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주소지를 옮기지 않았고 사업자 등록도 내지 않아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끝내 11월에 책방 문을 열었다. 악전고투지만 남은 책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책방 손님들은 인근 광주·순천·구례는 물론 서울에서도 온다. 김 대표는 웃으며 “강변에서 책을 보면 느낌이 다르다. 차도 마실 수 있다. 맘에 들면 책 한 권을 사도 되고, 책만 둘러봐도 좋다.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 가도 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맘껏 즐긴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손안에 책 수 백만 권의 콘텐츠를 들고 다니는 세상이다. 그렇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섬진강책사랑방’은 어디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진경산수다. ‘비기’(秘器)만 믿다가 ‘비경(秘境)’을 놓칠 수는 없다. 현대인의 파라다이스인 ‘호캉스’을 넘어 ‘책캉스’를 준비해 보면 어떨까. 당신만의 힐링을 위해 ‘버케이션’ 대신 ‘북케이션’을 권한다. 그 답은 이곳에 있다.



강석봉 기자 ks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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