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 인간과 비인간
권위에 복종하고 책임을 분산시킬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리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바로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이다. 나치의 충실한 부역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던 밀그램은 평범한 관료의 표상처럼 보이는 아이히만이 어떻게 수백만명의 목숨을 빼앗는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실험을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저자 브라이언 헤어는 자신의 책에서 인간의 잔인성을 촉발하는 다른 원인을 밝혀낸 심리학자 앨버트 밴듀라를 소개한다. 밴듀라의 실험 방식 자체는 밀그램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다. 피험자들은 감독관이 되어 학생(사실은 고용된 연기자들)이 시험에서 오답을 말할 때마다 그의 학습 태도를 개선하기 위해 전기 충격을 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감독관은 해당 학생들에게 줄 전기 충격의 강도(1~10 사이)를 결정할 수 있었다. 오답을 말한 학생에게 가할 전기 충격의 강도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피험자가 있던 방의 스피커가 조작 실수로(사실은 일부러) 켜지면서 다른 방에 있는 또 다른 감독관들(연구 참여자들)의 혼잣말이 들려온다.
그들은 저마다 어떤 학생에게는 칭찬을, 다른 학생에게는 혹평을 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여럿의 의견이 모두 일치했다. 밴듀라가 설계한 실험에 피험자들이 말려든 순간이었다. 밴듀라는 미리 연구자들에게 혹평을 할 때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그의 인간성을 인정하지 않는 표현(짐승 같다 등등)을 사용할 것을 주문해둔 터였다.
이런 평가는 피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피험자들은 다른 감독관들에게 비인간적 평가를 받은 학생들이 실수하는 순간, 피험자들은 전기 충격의 강도를 2배 혹은 3배까지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전기 충격을 받은 학생들이 그 충격으로 인해(물론 연기였겠지만) 또다시 실수를 하자, 인간적인 평가를 받은 학생들에게는 전기 충격의 강도를 줄인 데 반해, 비인간적인 평가를 받은 학생들에겐 이전에도 평균에 비해 높았던 전기 충격의 강도를 오히려 더 높이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같은 잘못에 대해 더 높은 강도의 벌을 준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 약 80%에 달하는 피험자들이 비인간적인 평가를 받은 이들에게는 그것이 더 정당한 징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밴듀라의 이 실험은 타인에 대해 ‘비인간화’가 이루어질 경우, 대상자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비인간화는 권위에의 복종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자 올리너는 아이히만과는 반대 사례, 즉 2차대전 당시, 자칫 반역자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숨겨주거나 탈출시킨 이들에게 주목했다. 무엇이 이들에게 대가 없는 정의를 실행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러 조력자들을 심층 인터뷰한 끝에, 올리너는 이들 사이의 중요한 공통점을 알아냈다.
그들은 모두 전쟁 전에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유대인 친구나 지인, 이웃이 있던 것이었다. 이미 그들과 친밀한 인간적 교류를 경험했던 이들은 엄청난 권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차마 비인간화시킬 수 없었고, 그렇기에 인간인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경우 조력자들의 재산, 교육수준, 사회적 지위, 민족적 특성은 별다른 연관이 없었다. 오직 상대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는지, 아닌지의 차이만이 이들이 목숨을 걸었던 거의 유일한 이유였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를 시청했다. 촘촘한 짜임새와 묵직한 울림과 같은 드라마적 미덕과는 별개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이나 비아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욕설이란 기본적으로 상대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동물이나 신체 일부, 형벌이 욕설로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비단 드라마만이 아니다. TV를 켜면 예능에서도, 영화에서도, 심지어 홈쇼핑 채널에서도 욕설이 들려온다. 인터넷으로 넘어가면 더 심하다. 마치 욕설을 하지 않고서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며,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에게 벌레 ‘충’자를 써서 비아냥대는 것을 아무렇지 않아 한다.
누군가는 이를 표현의 자유라 옹호하기도 하고, 솔직한 심정의 토로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일상적으로 짐승이나 벌레, 성기의 일부로 인식된 이들을 대할 때, 정말로 그들을 나와 동등한 선상에 두고 나와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며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까.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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