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빼고 '자문기구 정책'에만 의존···노동개혁 속도 내려다 '삐걱'

세종=양종곤 기자 2023. 3. 1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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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점 드러낸 노동개혁안
연장근로단위 확대 등 세부 대책
노동시장硏 권고문과 대부분 일치
6개 자문기구 중 노사참여 1곳 뿐
자문위원 대부분 학계···소통 부족
일각선 "주 69시간제 철회할수도"
[서울경제]

현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의 핵심인 근로시간제 개편에 제동이 걸렸다. 탄력을 받던 다른 개혁 과제 추진도 자칫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개편안에 브레이크를 밟은 이유로 내건 국민 소통 부족은 다른 개혁 과제 정책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와 노동계는 갈등이 깊어 현재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속도 높은 개혁과 공감 깊은 개혁이라는 다른 선택지를 두고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 청년활동가들이 15일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 사업자 간담회’에 참석한 이정식 고용부 장관 뒤에서 기습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5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6일 발표된 근로시간제 개편안은 전문가기구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권고문과 대부분 일치한다. 개편안의 핵심인 연장근로 단위 확대를 비롯해 건강권·휴식권 등 개편안의 세부 대책도 당시 권고문에 모두 담겼다.

이 방식은 정부 노동 개혁의 속도를 높였다. 고용부는 지난해 12월 권고문 발표 후 4개월 만에 개편안을 마련했다. 개편안은 노동 개혁 과제 중 첫 번째 정부 입법안이다. 정부는 과거 정부처럼 지난한 노사정 대화나 사회적 합의를 건너뛰었다. 전문가기구의 권고안을 기초로 정부안을 만든 뒤 국회가 이 안을 통과하면 바로 노동 개혁 과제가 시행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 방식의 단점은 국민 의견이 권고문과 입법안에 충분히 담겼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연구회는 토론회·현장방문·설문조사 등을 실시했다. 하지만 최근 개편안에 대한 반대 여론은 이 방식의 공감대 쌓기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일각에서는 개편안의 핵심인 주 69시간제가 철회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문제는 다른 노동 개혁도 근로시간제 개편안처럼 노사정 논의·합의 배제→전문가기구→정부 대책 도출이라는 방식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고용부와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만든 6개 노동 개혁 자문기구의 위원 구성을 보면 노사 참여가 있는 곳은 임금체계 개편을 논의하는 ‘상생임금위원회’ 1곳뿐이다.

이번 근로시간제 개편안의 밑그림을 그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위원장부터 위원까지 12명 모두 교수 중심 학계다. 다른 자문기구도 마찬가지다. 노조 회계 투명성 강화 대책을 조언한 ‘불합리한 노동관행 개선 전문가 자문단’은 학계 7명, 정부 3명, 회계사 1명으로 꾸려졌다. 노사 관계 전반에 대한 과제를 논의하고 있는 ‘노사관계 제도 및 관행개선 자문단’과 사회적 약자 보호 방안을 만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연구회’도 노사 참여 없이 학계 출신이 대부분이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정비가 목적인 ‘중대재해처벌법령 개선 태스크포스’도 노사 참여가 없다. 이들 자문기구의 논의 주제는 임금체계 개편, 파견법, 정년연장, 중대재해 감축 등이다. 근로시간제에 버금갈 만큼 국민적 관심이 높고 이미 노사의 찬반이 극명하게 나뉜 논쟁적 성격을 지닌다.

그동안 노동계는 이 같은 전문가기구의 인적 구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근로시간과 임금처럼 근로자 생활과 직결되는 제도 논의에 정작 근로자가 빠져 있는 게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계에서는 전문가기구의 제안도 현 정부 국정 방향처럼 경영계에 유리하다는 지적을 이어왔다. 경영계도 마찬가지다. 경영계에서는 근로시간제 개편안의 건강권 보호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불만을 품고 있다. 이처럼 정부가 직접 주도하지 않고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대책을 만들겠다는 취지는 노사의 두터운 공감을 얻지 못한 상황이다. 급기야 전문가기구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최근 현장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논의 구조 탓에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큰 우려는 현재 노정 갈등이 심해 전문가기구 내 노사 공동 참여를 기대하기 어려운 국면이라는 점이다. 양대 노총을 중심으로 노동계는 이미 노동 개혁을 ‘노동 개악’으로 규정짓고 거세게 반대해왔다. 최근 상생임금위원회에 참여한 노동운동가가 민주노총으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을 정도다. 전문가기구가 정부 대책의 ‘들러리’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사퇴 요구로 표출됐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정부가 노사에 전문가기구 참여를 적극적으로 제안하거나 노사정 논의·합의와 같은 과거 방식의 노동 개혁으로 선회할 가능성은 현재는 낮다. 노동 개혁의 배경을 보면 화물연대 총파업 대응, 회계 투명성 강화, 건설 현장 불법 근절, 국가정보원·경찰 수사 등 노조를 직접 향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구도 내에서는 노정이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대화 테이블에 앉기 어렵다. 게다가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를 중시하는 정부는 노조도 기성 노조가 아니라 MZ세대 노조를 대화 파트너로 삼았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날 근로시간제 개편안에 대한 현장 의견을 듣기 위해 양대 노총보다 MZ세대 노조로 평가받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를 먼저 만났다.

세종=양종곤 기자 ggm1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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