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백세까지 산다는 환상

2023. 3. 1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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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더니 평소 건강해서 그랬는지 100세까지 사는 걸 기정사실로 알아서 죽음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황망하게 떠나갔으니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수년 전 진료실을 찾아온 70대 남자분은 "암에 안 걸리고 90살 넘겨 살 수 있도록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정밀 검사를 다 해주세요" 하고 요청했다. 그래서 몸에 암이 생기지 않는 곳은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 세 군데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했더니 "사실은 120살까지는 살고 싶은데"라고 말하며 몹시 아쉬워했다. 건강검진을 열심히 받는다고 하여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요즘 방송과 언론 매체에서 100세 환상을 부추겨서인지, 누구나 웬만하면 80, 90세까지 살며 100세를 사는 일도 그다지 어렵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100세까지 산다는 것은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하는 현재로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보왕삼매론의 첫 구절이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이런 바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바람대로 되기 몹시 어려운 것이 삶의 현실이다.

이처럼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의 길이를 연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가보지 않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은 그렇게 회피하고 혐오할 만한 세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신학자이자 작가였던 스콧 펙은 자신의 강연을 들은 청중이 "우리에게 무언가 인생의 은총 같은 게 있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모두 죽게 된다는 점이죠. 인생을 끝낼 준비를 할 만큼 세상살이에 지친 건 아니지만 이런 쓰레기 같은 세상을 300~400년 더 헤치고 살아야 한다면 아마 내가 가진 모든 돈을 털어서라도 일찌감치 죽는 쪽에 투자할 겁니다." 죽고 나서도 냉동질소 탱크에 보관돼 미래에 해동되어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생사관을 보여준다.

토머스 제퍼슨은 "우리 모두에겐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산 뒤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죠"라고 말했다.

1986년 55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은 타계하기 얼마 전 병문안을 왔던 후배에게 "나 50년 살았지? 하지만 일과 여행, 놀이를 다른 이들 세 배는 한 것 같으니 150세까지 산 셈이지"라고 말하며 담담하게 생을 마무리하였다. 삶의 길이에만 집착하는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과 참으로 대조된다. 이러한 생사관으로 삶을 영위해 왔다면 애써서 100세까지 사는 걸 목표로 하는 삶을 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현채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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