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정년이”…창극과 웹툰의 ‘완벽한 만남’ [인터뷰]

2023. 3. 1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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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남인우·배우 이소연 조유아
오는 17일 개막, 국립극장 달오름
1950년대 여성서사에 Z세대 지지
“당대의 억압과 억울함에 대한 공감
지나온 선배로서 가슴 아프고 미안해”
정년이와 비슷한 서사 가진 배우들
“우리 모두가 정년이였기에 공감” 
이보다 ‘완벽한 만남’은 없다. 국립창극단과 웹툰 ‘정년이’가 만났다. 여성국극단을 배경으로 여성 소리꾼들의 연대와 성장을 그린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남인우 연출가(오른쪽)는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인 이소연 조유아는 나란히 캐스팅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계는 1956년 8월, 전쟁 직후로 되돌아간다. 전남 목포의 한 시장통. 어린 동생을 옆에 누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조개를 팔고 있는 열여섯 소녀가 있다. 소리 한 자락 들려주고 조개 더미를 팔아치우는 ‘생활의 달인’.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유전자는 빼어났던 정년이는 여성국극단의 공연을 보고 소리꾼의 꿈을 키운다.

“소리를 시작할 때, 변성기 과정에서 목을 혹사해 소리를 그만뒀을 때, 다시 소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창극단을 꿈꿨을 때…. 그 모든 날들 동안 저 역시 정년이었어요.” (이소연)

이보다 ‘완벽한 만남’은 없다. 국립창극단과 웹툰 ‘정년이’가 만났다. 여성국극단을 배경으로 여성 소리꾼들의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국립창극단의 간판 스타인 이소연 조유아는 나란히 정년이 역할에 캐스팅됐다. 오는 17일 개막을 앞두고 국립극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웹툰을 뛰어넘는 생생한 감동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져가는 여성국극을 되살린 국립창극단의 신작 ‘정년이’ [국립극장 제공]
무대의 미학…‘정년이’ 어떻게 달라지나

국립창극단 61년 역사상 이런 관심은 없었다. 캐스팅 공개 이전부터 전회차 매진을 기록했고, 개막 전부터 SNS를 오르내리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평점 9.97점. 웹툰 ‘정년이’는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여성 국극을 소재로 당대 소리꾼들의 성장을 담아낸다. 시간은 1950년대로 거슬러 가나, 동시대와 소통하는 ‘현대적 서사’가 특징이다. 특정 시대의 이야기를 넘어 여성 소리꾼들의 성장과 우정, 연대를 그렸기 때문이다. 젠더 감수성이 짙은 Z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다.

남인우 연출가는 “1950년대 후반, 전쟁 이후 남성지배적 사회에서 소수자, 비주류로의 억압과 억울함을 뚫고 나오는 여성의 성장 서사가 지금의 1020 세대에게 유효하다는 것이 가슴 아프기도 하고 지나온 선배로서 미안하기도 했다”며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이러한 반응이 여성서사 작품에 대한 요구이자 응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137화 분량의 방대한 서사는 50여곡의 판소리를 입은 무대언어로 다시 태어났다. 창작 판소리 ‘사천가’, ‘억척가’로 호흡을 맞춘 남인우 연출가와 이자람 음악감독이 다시 한 번 만났다. 남 연출은 극본 작업도 진행했다. 그는 “웹툰에선 버리기 아깝고 안타까운 인물들의 서사가 너무나 많았다”고 말했다. “시간의 압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판소리적 어법”이었다. 서사의 신축(늘이고 줄임)이 자유로운 판소리는 수십년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고, 1분을 5분으로 늘이거나 한 시간을 1분으로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생략과 은유, 과장의 기법이 무대 위에서 상징적이면서도 직관적으로, 빠른 호흡으로 채워진다.

남 연출가는 “빠져나간 서사를 어떻게 하나의 이미지로 전환할 것인지, 긴 이야기를 음악 안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를 고민하며 작업했다”고 말했다. 최고의 관전 포인트는 웹툰에선 들리지 않았던 창극배우들의 ‘소리 열전’이다. 서사를 뛰어넘는 ‘짜릿한 쾌감’을 만나는 장면들이다. 이소연은 “텍스트로만 보던 이야기에 생생한 소리가 입혀지는데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냐”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최근 등장하는 여성서사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연대’와 ‘성장’을 큰 줄기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정년이’에서도 여성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서사’ 작품의 두 가지 특징을 완성한다. [국립극장 제공]

매체가 달라지는 만큼 웹툰과 창극은 다른 이야기로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나 장면의 변화, 결말의 변화도 있다. 기존 원작이 가진 인물은 창극에선 “다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원작 속 정년이의 노래 선생님 패트리샤는 남성 캐릭터로 달라졌다. “당시 여성의 위치를 보여주기 위해선 남성의 지배적 분위기를 담아낼 필요가 있다”는 남 연출가의 판단이었다.

그는 “원작을 다른 언어로 재해석했고, 재해석 과정에서 원작이 가진 뿌리가 땅을 파고 들어 어떤 나무를 키웠는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놓치지 않으려 한 이야기의 중심은 있어요. 그 시대에 여성 국극이 가진 예술적 갈증, 사회문화적 갈증이 정년이라는 인물을 통해 어떻게 여성서사로 만들어졌는지를 무대 언어로 재현하겠다는 생각만 확고히 남겨뒀어요. 판소리를 입은 생생한 음악, 무대 언어가 가진 생략과 압축, 극장이라는 하드웨어가 가진 미장센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남인우)

개막을 앞둔 배우들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진다. 이소연은 “처음엔 부담이 컸다”고 했다. 워낙 인기 웹툰이기에 비교를 피할 수 없다. 그는 “우리 눈은 웹툰처럼 땡글땡글하지 않는데, 외모 싱크로율이나 독특한 표정 등에서 이질감이 오면 어쩌나 걱정했다”고 털어놨다.

“연습과 연구를 통해 답을 찾아갔어요. 원작에서 인물들의 만화적인 표정은 우리의 많은 표정 중 하나를 캡처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표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이끌어가기 위해 그저 이 아이의 삶을 살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소연)

창극 ‘정년이’ 배우 조유아, 이소연, 남인우(왼쪽부터). 임세준 기자
상반된 두 명의 창극배우가 같은 역할로…“우리 모두 정년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춘향’부터 ‘옹녀’까지, 국립창극단의 여주인공 역할을 도맡았던 이소연과 ‘향단’부터 ‘외계인’, ‘뱀장어’까지 감초 역할을 해온 조유아가 한 인물을 연기한다. 자유 소리, 지정 대본, 독백 등 3차까지 진행한 오디션을 통해 합격했다. 남 연출가는 “두 사람 본연이 가진 캐릭터, 목소리 등 모든 것이 전혀 달라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다른 두 배우가 하나의 캐릭터를 보여줄 때에도 이야기가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웹툰은 후반부로 갈수록 퀴어적 성격이 많고, 정형화된 여성의 이미지가 나와요.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정년이의 서사를 가지면 어떨까 생각하며 두 사람을 선택하게 됐어요.” (남인우)

창극단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은 각별하다. 이들 모두가 곧 ‘정년이’이기 때문이다. 시대와 세대를 떠나 소리꾼의 꿈을 꾸던 사람들, 그 열망을 품고 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일평생 달려온 사람들이다. 2013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어느덧 11년차. 이소연의 삶도 그렇다.

“‘춘향’ 공개 오디션을 본 뒤 첫 대본 리딩날이었어요.” 2010년 객원 단원으로 선 무대였다. “대사, 소리, 연기, 동선까지 모든 선생님들이 두 세달을 한 것처럼 연습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더라고요. 동대입구 역까지 걸어내려가며 제 자신이 너무 못나 보여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정년이처럼 더 잘하고 싶어 욕심을 내고, 더 열심히 했던 때였어요.” (이소연)

창극 ‘정년이’에 배우 이소연과 조유아를 주인공으로 낙점하며 남인우 연출가는 “두 사람 본연이 가진 캐릭터, 목소리 등 모든 것이 전혀 달라 선택했다”고 말했다. 임세준 기자

“진도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유학한” 조유아에게 ‘목포소녀’라는 정년이의 한 줄 수사는 ‘공감의 키워드’였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씩 연습”하고, “힘든 길이라고 만류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우겨가며 소리꾼의 꿈”을 지켰다. 그의 부친이 전남 무형문화재 제40호 조도닻배노래 예능보유자 조오환이다.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로 시골 소리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어요. 시김새가 진하고 구성진 느낌의 소리죠. 정년이도 목포소녀이다 보니, 국극단에 들어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더라고요. (웃음)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없었어요.”(조유아)

남 연출은 두 캐스팅에 만족감이 높다. 그는 “이소연은 가공이 잘 된 보석 같은 배우”이고, “조유아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라고 했다.

‘단골 여주 캐릭터’였던 이소연은 섬세하다. 조유아는 그에 대해 “한 문장 안에서 여러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라고 했다.

“이소연은 가진 것도 많고, 무대에서 상대의 말을 듣고 자기 마음을 나눌 줄 아는 배우예요. 배우가 감정노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소연은 참 담대해요. 상대가 주는 정서적 무게를 자기를 통과해서 내뱉을 줄 아는 힘이 있어요. 조유아는 가공되지 않았지만, 그 안에 굉장히 아름다운 보석을 가지고 있어요. 늘 어떤 장면의 신스틸러였기에, 빌드업하며 정서를 끌고 가는 훈련이 적었음에도 섬세함을 잘 꺼내고 있어요. 껍데기가 많은데 점차 갑옷이 벗겨지는 느낌이에요.” (남인우)

동선, 춤, 연기 방향성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고작 2~3분 내외의 짧은 출연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조유아는 독보적 존재감을 가졌다. 그는 “그동안엔 모든 걸 혼자 해왔는데, 이 작품을 통해 나 역시 정년이처럼 성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웹툰 ‘정년이’와의 만남으로 국립창극단은 딱 맞는 옷을 또 한 벌 찾았다. 창극단의 강점인 단원들의 소리와 연기를 보여주면서도, “여성 소리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색다른 캐릭터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남인우)이다. 웹툰의 화제성과 함께 이 작품을 계기로 창극단에도 기존 관객이 아닌 새로운 관객층이 유입되고 있다.

“판소리가 시공간에 상관없이 모든 이야기를 담는 것처럼, 창극도 시대의 구분없이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요. 고전부터 근현대의 이야기, 웹툰을 비롯한 다양한 소재도 포괄할 수 있고요. 어떤 이야기든, 어떤 소재든, 어떤 시도든 할 수 있어요. ‘정년이’도 그 중 하나이고, 이 작품을 통해 동시대, 동세대와 더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이소연)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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