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없지만 곧 일어날 일, <질투의 화신>의 서숙향

한겨레21 2023. 3. 1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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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질투의 화신> 의 서숙향 - 집요하게 조사하고 발칙하게 뒤집는 이야기꾼
작업실에서 만난 서숙향 작가. 최성열 <씨네21> 기자

서숙향 작가의 명대사는 당장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명랑함과 발칙함으로 빛난다. “예, 솁”(공효진), “봉골레 파스타 하나!”(이선균)처럼 별것 아닌 한마디가 그의 아기자기한 로맨스를 통과하면 유행어가 된다. “자기 인생에 물음표 던지지 마. 그냥 느낌표만 던져”(조정석)같이 어떤 대사들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쓰인 것처럼 배우 본연의 매력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구성작가 이력만 15년. <주병진쇼> 메인 작가로 방송가에서 일찌감치 활약했던 그는 1990년대 말 돌연 드라마작가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2002년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된 이후 약 2년 주기로 꾸준히 신작을 발표했으며 <파스타> <질투의 화신>으로 특히 사랑받았다. 지금의 배우 공효진을 있게 한 ‘공블리’ 신화의 주역이 바로 서숙향이다.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새 활로를 개척한 그는 코믹한 감수성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한 2010년대 ‘로코물’(로맨틱 코미디물)의 중심에 서 있었고, 최근 숨 고르기의 시간을 거쳐 로맨스의 무대를 머나먼 우주정거장까지 확장시켰다. 이민호, 공효진 주연의 500억원대 텐트폴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 촬영이 한창 막바지로 향한 3월의 초입에 그를 만났다. 서울 여의도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에서 서숙향 작가는 소재 발굴, 자료 조사, 대사 쓰기 등 대본 집필 단계별로 축적되어온 경험의 소산을 나눠주었다. “<파스타>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썼고, “<별들에게 물어봐>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그에게 드라마는 여전히 신기한 생명체였다.

‘공블리’ 신화의 주역, 로코 접수하고 SF까지

―데뷔 이래 늘 2~3년 주기로 신작을 발표했는데 신작 <별들에게 물어봐>는 그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네, 후반작업을 공들여 마치고 2024년에 공개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기름진 멜로> 이후 7년 만인 거지요. 어쩌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버린 건지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예요. 긴 시간인 것 같지만 그동안 저는 전혀 여유가 없었거든요. (웃음) 쓰기는 5년 정도 썼어요. 우주정거장에 대한 우리나라 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터라 내내 분주했어요. 큰 힘이 되어준 분이 2006년 과학기술부가 주최한 우주인 선발 대회에서 뽑혀 우리나라 최초로 우주에 다녀온 이소연씨죠. 지금 미국에 계신데, 제가 궁금한 것들을 정리해 물어보면 곧장 답해주거나 혹은 현지 우주인들 모임에 나가 물어봐주곤 했어요. 그 외 약 30명의 자문단과 함께하면서 제가 참 그들을 괴롭히고 또 괴롭혀서 썼죠. 중력이 사라지면 아주 작은 생리부터 인간의 모든 것이 달라지거든요.”

―어쩌다 지구 밖 우주로까지 로맨스의 무대를 넓히게 된 건가요.

“실은 제가 <기름진 멜로> 이후 혼자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 <파스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중식 주방의 풍경을 펼쳐보았으나 잘 아는 것을 쓰다보니 과거를 답습한 부분이 있지 않나 되돌아보게 된 거죠. 다음 기획은 무조건 내가 전혀 모르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어 초심자의 마음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을 준비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작가들을 위한 조언 중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을 써야 한다는 말과 오히려 반대네요.

“제가 아주 흥미롭게 기억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예전에 권석장 피디(<미스코리아> <파스타>)와 함께 아이템을 찾고 회의하던 시절의 일인데요. 몇 달씩 둘이 앉아서 두런두런 온갖 아이템을 꺼내놓는 거예요. 감독님은 제가 아이디어 100개를 이야기할 동안 담배만 피우세요.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닌 거죠. 그러다 지쳐서 정말 실없는 이야길 하나 꺼냈는데 갑자기 침묵. 그러곤 “그거 좋다. 그거 하자” 하시기에 제가 “아니, 왜요?” 하니까 “그 뒤에 뭐가 나올지 전혀 예상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어떤 아이디어 뒤에 이어질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연상된다는 건 사실 이미 누군가 했거나 내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본 적이 있다는 거죠. 전혀 감도 오지 않는 소재에 우선 뛰어들 필요성을 그때 어렴풋이 배웠습니다.”

서숙향 작가가 작업테이블에 앉아있다. 최성열 <씨네21> 기자

주방에서 하루 동안 오간 말 모두 녹음

―<파스타>와 <기름진 멜로>의 주방, <질투의 화신>의 뉴스룸, <로맨스 타운>의 저택 등 작가님의 직업 드라마들은 장소에서 큰 영감을 얻은 결과물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장소에서 나오는 에너지로부터 이야기를 구체화하죠. <파스타> 때는 주방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두 미니시리즈가 시청률 면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파스타>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썼죠. 얼마나 마지막이다 싶었으면 밥도 잘할 줄 모르던 여자가 주방 드라마를 시작한 거예요. 모친이 80살 되실 때까지 평생 딸 밥 먹이겠다고 음식을 해주셨으니 그런 면에서 저는 좀 부끄럽죠. <별들에게 물어봐>도 우주정거장부터 떠올리지 않았다면 못 썼을 것 같고요.”

―요리를 잘 모르는데도 <파스타>를 밀어붙인 건 소재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가요.

“물과 불과 기름, 그리고 칼이 있는 주방이 곧 전쟁터란 생각에 흥분했지요. 작은 전쟁터에서의 로맨틱 코미디를 구상한 거예요. 15명 정도 되는 요리사들에게 마이크를 채워 하루 동안 주방에서 오가는 모든 말들을 녹음하고, 한 레스토랑에 보름 정도 거의 살다시피 있기도 했죠. 식당 50곳을 다녔어요. 몇 개월 했더니 이제 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 찾아오더군요. 저는 취재에 시간을 많이 들인 후 빨리 써내려가요. 그게 두려움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잠시 옛날로 돌아가보죠. 방송작가로 이미 인정받던 상황에서 왜 드라마로 전향을 결심했나요.

“<주병진쇼> <주병진의 데이트라인>을 거치면서 일이 많이 들어올 땐 프로그램을 3~4개씩도 했어요. 뒤도 안 돌아보고 재밌게 일한 게 10년이 훌쩍 넘어요. 수입도 괜찮았고요. 그런데 방송사 아이템도 결국 유행 따라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라 33살 무렵에 내가 정체되고 있다는 위기감이 확 든 거죠. 방송일이 불안정한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자극적이고 재밌는 일이 드물어요. 시사·오락 프로그램은 후회 없이 했으니 그 옆에 있는 드라마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습니다. 벌어놓은 돈 다 쓸 때까지만 버텨보자, 그렇게 시작했어요.”

전문가가 “모른다”고 할 때까지 물어봐야 끝난다

―잘나가던 커리어를 접고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과정에서 조급함은 없었는지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작업실부터 구했어요. 월세가 나가야 긴장하고 쓰니까. 교육원 기초반, 연수반, 전문 창작반을 중간에 한 번씩 떨어지면서 쭉 따라갔습니다. 그러다 KBS 공모에 당선됐죠. 방송작가에서 드라마작가가 되기까지 한 6년 걸렸으려나요. 저는 자신감은 없지만 무모한 사람 같아요. 승부사라기엔 이기는 것에 큰 관심이 없고 지더라도 매번 위험한 쪽에 베팅하는 게 체질에 맞습니다. 사실 제 드라마 성적들만 해도 그렇잖아요? 꾸준히 해왔고 시청자들의 큰 사랑도 받아봤지만, 시청률로 어마어마한 수치를 기록했다거나 대단하게 1등을 했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런데도 좋아하니까 계속 하는 거지요.”

―집요한 자료조사의 노하우는 <주병진쇼> 메인 작가로 오래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근육에 새겨진 걸까요.

“<주병진쇼>, 15년 했죠. 그건 지금 생각하면 운이 컸어요. 방송작가가 되고 싶어서 방송사에 지원했는데 덜컥 붙었고, 당시 이영돈 피디가 대학 선배였어요. 호스트와 피디가 제각기 성격파라 현장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웃음) 그러니 그 사이에서 둘을 중화해줄 꼼꼼한 메인 작가가 필요했겠죠. 여러 이유로 저를 그 자리에 앉히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운 좋게 기회를 얻었으니 정말이지 제대로 해내고 싶었습니다. 20대 중반이었는데 당시 연인과도 헤어졌어요. 만날 시간이 없어서.”

―드라마 취재의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요.

“전문가도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까지 취재하는 것. 거기까지 밀어붙여야 제대로 했다고 생각해요. 잘 아는 것만 취재하면 누가 물어봐도 상관없는 대답들이 나와요. 드라마란 개연성 있는 상상력의 공간이니까 전문가와 같이 팩트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편이에요. 친밀함을 넘어 집요함까지? (웃음) 저와 보조 작가들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까지 팩트로서 검증될 수 있는지 물어봐요. 어떤 분들은 처음에 화도 내시죠. 말이 안 된다, 그럴 일은 없다고. 그러다보면 아직은 없지만 앞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을 취재원과 같이 만들어내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서숙향 작가가 자주 쓰는 필기도구들. 최성열 <씨네21> 기자

서숙향 작가는 2002년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되며 드라마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대체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작가들이 상금으로 작업용 노트북을 마련할 때, 그는 유유히 PC방을 찾았다. 현재 사용 중인 PC 역시 <파스타> 전부터 쓰고 있는 고물이다. 핸드폰도 여기저기 금이 간 지 오래다. 작가는 말한다. “그때 제 안에 묘한 경계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터넷 자료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제 색깔과 시간을 잃어버릴까봐. 인턴 작가들은 1년 동안 매달 1편씩 단막극을 써야 했는데, 온라인에서 남의 소재를 끌어오지 말고 오직 내 안의 땅굴만 파고 또 파서 1년을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매달렸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내 안을 쳐다보겠나 하는 심정으로요.”

―배우 공효진의 생활감 넘치는 연기로 대표되는 일상적 구어, 속사포 같은 말하기가 서숙향표 대화의 특징입니다. 대사 쓰기의 원칙이 있을까요.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까지 빼겠다는 생각으로 한 문장, 한 대사를 짧게 쓰다보면 오히려 대사들의 행간이 살아납니다. 한 사람이 툭 던지면, 상대방이 슬쩍 받아내는 대사 사이의 공기를 만들어내는 재미로 써요. 드라마를 20년 이상 쓰면서 대본, 연기, 연출의 3박자가 잘 맞는 순간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 서로 소통이 잘 안되면 대사의 묘미를 살리기 어려운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각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 무엇일지 늘 고민되는 건 사실이에요.”

―만년 구박이나 받는 셰프 지망생 서유경(<파스타>), 온갖 설움과 수모를 견디면서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기상 캐스터 표나리(<질투의 화신>)는 공효진의 청춘이었습니다. <별들에게 물어봐>에선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원정대장으로 변모했죠. 세월을 함께했으니 대본을 쓸 때 그의 목소리와 말투가 자동 재생될 것 같은데요.

“배우를 미리 상상하며 쓰는 스타일은 못 돼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요. 제가 캐릭터를 독자적으로 구축해놓으면 이후에 배우가 자신의 해석대로 더하고 빼면서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길 바라요. 서로의 영역이 있는 거죠. 공효진 배우는 이제 저와 제작에 필요한 여러 현실적인 여건들까지 함께 논의하는 프로 중의 프로죠. 언제나 변화에 열려 있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제가 의도한 대본의 행간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구는 순간을 기다린다

―<질투의 화신>에 이어 <기름진 멜로>에서 호흡을 맞춘 이미숙, 박지영 배우 역시 톡톡 튀는 대사들을 스타카토로 경쾌하게 소화해내죠.

“전 두 분을 믿고 그래서 대사를 어마어마하게 써놓는 편입니다. 지문과 설명은 최소화하려는 편인데 가끔 ‘(컷을) 나누지 말고 배우가 한번에 소화하게 해주세요’라고 써놓을 때는 있어요. 혼자 떠드는 장면으로 A4용지 두 장까지 써본 것 같네요. 이게 가능한가? 배우들이 볼멘소리 할라치면 저는 슬쩍 딴 데 봅니다. (웃음) 특히 이 두 분은 엄청난 베테랑이라 누가 툭 치면 술술 쏟아져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외운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시티> 단막극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2002년) 이후 20년이 훌쩍 넘게 흘렀습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요.

“제 인생이 제일 재밌을 때가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의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굴 때, 뜻대로 신나서 이야기를 끌고 갈 때예요. 그 희열로 살고, 씁니다.”

―자주 오나요, 그런 순간이.

“아니죠. 문제는 안 올 때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웃음) 그리고 방송을 볼 때도 좋아요. 특히 현장에서 대본을 즐겁게 가지고 놀았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을 보면 작가로서는 더없이 기쁩니다. 그래서 지겨울 틈 없이 계속 합니다. 매력과 고난이 하나인 거지요.”

―많은 서사 장르 중 드라마를 쓴다는 것.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가족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인데 밤 9시 무렵 환자들이 다들 잠들고 나서 혼자 복도로 나왔죠. 적막한 병원 로비 텔레비전에서 <커피프린스 1호점>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위로받았어요. 앞으로 1시간 동안만큼은 드라마가 잠시 내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해줄 테니까. 그냥 고마웠어요. 드라마의 역할이란 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선의의 로맨스
서숙향의 로맨스엔 지나치게 피로하거나 위악적인 갈등이 없다. 미운 얼굴은 있어도 악한은 드물다. 작가는 “장점이라기보단 약점인 것 같아 고민된다”고 했다. “저는 여자를 쓸 때만큼 남자를 쓸 때도 애정이 많이 가고 재미있는데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귀가해서 보니 창가에 앉은 어머니가 혼자 발톱을 깎다가 울고 계시더군요. 수개월 만에 자기 발톱을 깎은 거예요. 그동안 엄마랑 저는 살면서 직접 발톱을 깎아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거지요. 아버지가 그런 분이었어요. 수험생 시절에 잠이 모자라서 딱 1시간만 쪽잠 잔다고 하면 제 발에 실을 묶어 창밖에 떨어뜨려놓고 1시간 뒤 창가에서 실을 잡아당겨 깨우던 분이셨죠. 창밖에서 딸을 놀라게 해줄 무언가를 준비해 서 계셨고요.” 인물들이 서로 냉정히 상처 입히는 장면에서조차 묘한 온기가 감도는 그의 서사는 하루치의 긴장을 이완하는 시간에 드라마를 찾는 시청자들에게 미더운 선택지가 된다.

글 김소미 <씨네21> 기자, 사진 최성열 <씨네21> 기자

서숙향 작가의 신작 <별들에게 물어봐> 스틸컷. 키이스트 제공

에필로그

10대 시절, 서숙향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미대 가면 굶어 죽는다는 그 시절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방송반을 기웃거린 건 반항심의 표출이었다. 그 뒤로 대학 방송부를 거쳐 평생 방송가에 몸담고 있으니 운명은 운명이다. 그는 어디를 가리킬지 모르는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지만 한번 꽂히면 깊고 길게 사랑한다. “어느 감독님과 연극을 보러 가는 길에 잠시 시간이 남아 인사동의 달항아리 전시장에 들렀죠. 그 앞에 서는 순간 마치 도공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 감독님 혼자 연극을 보고 나와서 다시 전시장에 돌아올 때까지 제가 내내 그 앞에 서 있었대요.”

한번 잡힌 집필 루틴도 변하는 법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씻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 전날 작업을 정리한다. “일어나면 어제 쓴 것에서 ‘덜어낼 감정’부터 떠오릅니다. 그걸 지우고 퇴고하고 나면 오전이 지나가고 점심 땐 열심히 청소를 하죠. 제2의 적성은 집 안 관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미니멀하지만 이곳저곳 공들인 흔적이 가득하고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그의 작업실은 “방송가에 안착한 30여 년간 여의도를 벗어난 법이 거의 없”는 서숙향의 우주이고 정거장이다. “한참 골방에서 외롭게 글을 쓰고 나면 사람의 온기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찾아와요. 하지만 마음먹고 한 외출도 결국 여의도 근처죠.(웃음)” 고집스럽게 정주하되 자신이 선 자리에서 가장 먼 곳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는 어떻게든 작가이고 말 운명이다.

작품목록

<별들에게 물어봐>(2024년 방영 예정)

<기름진 멜로>(SBS, 2018년)

<질투의 화신>(SBS, 2016년)

<미스코리아>(MBC, 2013년)

<로맨스 타운>(KBS, 2011년)

<파스타>(MBC, 2010년)

<대한민국 변호사>(MBC, 2008년)

<미스터 굿바이>(KBS, 2006년)

<환생-NEXT>(MBC,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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