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찬란한 50대 중년여성을 ‘다시 봄’

2023. 3. 1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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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의 중년 여성.

서울시뮤지컬단의 뮤지컬 '다시 봄'(15일 개막·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진숙 역할로 더블 캐스팅된 동갑내기 배우 문희경(58)과 왕은숙(58). '다시 봄'의 연습 이후 만난 두 배우는 지친 기색도 없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5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시 봄'도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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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다시 봄’ 진숙役 문희경·왕은숙
더블캐스팅 두 배우의 ‘자기 이야기’
문희경 “더 잘살아야겠다 생각 했죠”
왕은숙 “힘내서 살자는 친구가 관객”
배우 문희경과 왕은숙이 서울시뮤지컬단의 뮤지컬 ‘다시 봄’에서 진숙 역할로 더블 캐스팅돼 관객과 만난다. 더블 캐스팅 된 배우들은 신경전이 치열하나 두 사람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문희경은 “원래 알던 사이라 의지도 많이 되고 든든하다”고 했다. 임세준 기자

50대 중반의 중년 여성. 갱년기 안면홍조로 인해 메인 앵커 자리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아나운서다. 한 사람의 삶을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더블은 물론 트리플, 쿼드러플 캐스팅이 흔해진 시대. 무대만의 ‘국룰’(국민룰)이 존재한다. 같은 역할을 하는 배우들 사이에선 ‘기싸움’과 ‘신경전’이 살벌하다. 서로의 연습 현장은 물론 공연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더블은 경쟁을 하지만, 우리 나이대엔 그런 거 안 해요. 어릴 때나 하는 거죠. (웃음) 도리어 든든해요. 원래 알던 사이라 의지도 많이 되고요.” (문희경)

서울시뮤지컬단의 뮤지컬 ‘다시 봄’(15일 개막·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진숙 역할로 더블 캐스팅된 동갑내기 배우 문희경(58)과 왕은숙(58). 두 사람의 첫 만남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우 문희경은 “같은 작품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수십년 간 서로를 지켜본 사이”라고 했다. 40년차 배우 왕은숙은 “(문)희경 씨는 내가 속한 서울시뮤지컬단과 쌍벽을 이루던 서울예술단에서 활동했고, 서로의 공연을 보러 다니며 친분을 쌓았다”고 했다. 문희경은 1987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아 가수로 데뷔한 이후,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섰다. 첫 작품은 윤석화가 주연을 맡았던 ‘아가씨와 건달들’의 단역이었다. 싱그럽던 배우 초년생 시절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을 공유한 사이다.

“더블의 장점은 서로의 연기를 보면서 좋은 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어요. 정작 관객은 두 배우의 연기를 비교하지 않는데, 배우들이 서로의 것을 비교하며 경쟁하곤 하죠.” (왕은숙) 한 마디를 하면 ‘척’하고 받아친다. 오랜 ‘시간의 길이’가 만든 이심전심이다. “우린 서로의 것을 존중하고 인정해요.”(문희경)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왕은숙)

‘다시 봄’의 연습 이후 만난 두 배우는 지친 기색도 없었다. 개막 디데이를 세고 있는 지금은 “배우들에겐 예민한 시기”(왕은숙)이자 “긴장 상태의 연속”(문희경)이라고 한다. “감기라도 걸릴까 조심”하며, 각자의 역에 체화되는 때다.

‘다시 봄’ [세종문화회관 제공]

■ 국내 첫 디바이징 뮤지컬…지속가능성 위한 실험

‘다시 봄’은 독특한 작품이다. ‘실험’과 ‘파격’이 이 안에 담겼다. 작품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시도된 ‘디바이징(Devising)’ 뮤지컬이다. 대본이 없는 상태에서 배우들의 실제 삶을 기반으로 극을 만들었다. 주인공은 왕은숙을 비롯한 서울시뮤지컬단의 50대 여배우 7명이다. “신상 털이 하듯 탈탈 털어낸”(왕은숙) 이들의 이야기와 강원도 화천에서 열린 창작 워크숍에서 만난 50대 현지 주민들의 사연, 여기에 ‘약간의 상상’를 덧대 만들어졌다.

“제작 과정에선 우리의 이야기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털어놔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대본이 나온 이후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우리 이야기가 그대로 쓰였더라고요.” (왕은숙)

초연은 지난해 10월이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5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재연 무대에선 ‘특정 사람들’의 이야기로 출발한 창작 뮤지컬의 지속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이른바 ‘국민 센 엄마’로 불리는 문희경을 비롯한 새로운 배우들이 기존 일곱 명의 역할에 더블 캐스팅됐다. 굳이 대본을 분석할 필요도 없던 ‘원조 배우’들과 달리 새롭게 합류한 배우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막중하다.

“이전 팀들을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새로운 배우들은 짜맞춰진 틀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힘든 점이었어요. 연습을 하면서 스토리나 구조에 있어 의견을 제시하다 보니, 이것 역시 나의 이야기로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수정과 보완을 이어가면서 ‘다시 봄’이 40~50대 여배우들이 꼭 하고 싶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어요.” (문희경)

‘다시 봄’ [세종문화회관 제공]

■ 50대 여배우들의 ‘자기 이야기’

50대는 복잡한 나이다. 엄마로, 아내로, 사회인으로 치열한 삶을 사느라, ‘나’를 돌볼 틈이 없었다. 그러다 사회에선 조금씩 자리를 내주고, 어느날 문득 돌아보니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 옆자리를 차지한다. 지긋지긋한 갱년기와 “방심하면 찾아오는 관절염” 같은 이상 증세들. 50대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는 두 배우의 시계도 잠시 멈추게 했다.

“대본에선 ‘인생 2막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냐’는 대사가 나와요. 20대부터 평생을 무대에서 살아오면서 끝까지 배우로 남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나의 인생 2막과 노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순간 ‘띵’하고 각성이 되더라고요.” (왕은숙)

문희경도 “작품에서 공감대가 많이 생긴다”고 했다. 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문희경은 “인생은 아이러니하다”며 “언제 어떻게 내 삶이 바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삶엔 철저히 계획해서 얻은 것은 많지 않다. 스스로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 제주에서 올라왔고, 불문과 전공을 살려 샹송경연대회(1986)에 나가 대상을 받았다. ‘가수들의 등용문’인 강변가요제를 거쳤고, 가수 생활이 맞지 않아 뮤지컬로, 영화로, TV로 영역을 넓혔다.

“아나운서인 진숙의 상황이 이해가 돼요. 오래 연기를 하다 보니 후배들이 점점 치고 올라오고, 출연료 경쟁에 밀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설 자리가 줄어요. 연기력과 인성이 바탕하지 않으면 이곳에서도 버티기는 힘들어요.” (문희경)

늘 주인공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왕은숙은 조지 거슈윈이 작곡한 오페라를 뮤지컬로 옮긴 ‘포기와 베스’를 본 뒤, 강렬한 열망을 품고 서울시뮤지컬단에 입단했다. 그 때가 1984년이다. 뮤지컬단에 들어와 수년이 지나 ‘포기와 베스’의 오디션을 통해 꿈에 그리던 배역을 따냈다. 왕은숙은 당시를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꼽는다. 이후 ‘빅토르 최’에서 주연을 맡았고, 뮤지컬의 ‘킬링 포인트’인 고음 파트도 도맡았다. 남북 이산가족 교류가 물꼬를 트던 시절엔 평양 방문 예술단 1호로 역사의 현장을 함께 했다.

‘다시 봄’ [세종문화회관 제공]

“10년만 젊으면 어떨 것 같냐고 많이 물어보잖아요. 전 현재가 좋아요. 지금 제 삶이 행복하고요.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겨 고민하게 돼요. 주름, 당연히 생겨야죠. 좀 변해가야 인간미가 있지, 이 나이 먹었는데 팽팽해봐요. 이상하잖아요.” (왕은숙)

연기 경력만 해도 둘이 합쳐 약 80년.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지금이 우리에게 가장 찬란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왕성히 활동해야 했던 시기엔 “결혼에 대한 후회”(왕은숙)도 따라왔다. “대사도 외우고 연습도 더 해야 하는데, 집에 오면 젖병을 삶고 아이들 돌봐야 하니 결혼 안 한 친구들은 참 편하겠다, 오로지 작품만 하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어요.” (왕은숙)

“목숨을 걸고” 오디션을 준비했고, 매순간 무대에서 치열했다. 모두가 원하는 역할이 아닌 “내가 잘할 수 있는 역할”(문희경), “내가 빛낼 수 있는 역할”(왕은숙)로 작품을 장악했다. “아마도 서울시뮤지컬단에선 제가 가장 많이 공중에 매달렸을 거예요. 그만큼 개성 강한 역할을 많이 했어요.” (왕은숙) 뮤지컬 ‘지붕 위에 바이올린’에선 꿈속에 등장하는 할머니로 고작 한 장면에 출연하지만, 무대 위 ‘신스틸러’가 따로 없다.

지치지 않고 달려온 지금의 삶은 무엇보다 값지다. 50대에 접어든 이후 배우 문희경의 삶은 어느 때보다 빛이 난다. 무대와 스크린, TV를 오가고 가수 활동까지 시작한 ‘올라운더’다. 그 역시 “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불안해한 적은 없다”며 “치매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연기는 계속 하고 싶다. 할머니의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 몇 년 사이엔 ‘힙합의 민족’(2016), ‘트롯파이터’(2020)과 같은 음악 예능 프로그램부터 인기 드라마까지 섭렵했다. 활동이 위축될 수 있는 시기이지만, 문희경의 영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장됐다. 그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고, 찾아오는 기회를 잘 잡았으며,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을 만난 덕분”이라며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스스로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런 문희경을 롤모델로 꼽는 후배들이 적지 않다.

“점점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저도 윤여정 선생님처럼 70대에 오스카 상을 받을 수 있고, 세계적인 배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요. 그건 선생님께서 그만큼 잘 살아오셨기에 후배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주는 거예요. 저 역시 모범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 (문희경)

‘다시 봄’ [세종문화회관 제공]

50대 그 후…내려놓고 서로의 조력자가 되는 나이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주인공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문희경은 “우리의 나이를 받아들이며, 주연이 아닌 조연이더라도 빛을 내는 사람이 돼야할 때”라고 했다. “이젠 서로의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함께 빛나야 하는 때죠. 나 혼자 튀려고 하면 균열이 생겨요.” (왕은숙)

‘다시 봄’도 그런 작품이다. 2030세대의 여성 관객들이 주도하는 뮤지컬 시장에서 ‘스타 남자 배우가 아닌 중년 여성 배우들이 한가운데로 나왔다. 14명의 배우들은 모두가 주인공이면서 조연이다. 문희경은 “50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온다”며 “이 작품은 조금씩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의 삶이 그려가야 할 모습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 공연은 지난해 초연에서도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관객들이 극장을 가득 메웠다. 5060 세대에겐 인생 2막의 희망과 위로를 안기고, 2030 세대에겐 잊고 있던 엄마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이 여러 세대와 소통한 배경이다. 문희경은 “고물가 시대에 주머니 사정도 열악해졌는데 합리적인 가격에 힐링할 수 있는 공연”이라고 말했다. 왕은숙도 말을 보탰다. “자극적인 복수극이 아닌 2060 세대까지 아우르는 콘텐츠이자 ‘이 가격에 이 퀄리티가 맞나’ 싶을 만큼 잘 만든 공연”이라고 했다.

“작품에서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 새로운 생을’이라는 노랫말이 나와요. 이게 우리 작품의 주제예요. 그동안 힘든 일을 겪고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자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요. 그 친구들이 바로 관객이기도 하고요. 50대의 중년 여성들은 그간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아왔으니, 남은 인생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보자는 거죠.” (왕은숙)

“엄마라는 키워드는 굉장한 감동을 안겨요. 사실 자식들은 엄마의 마음, 특히 갱년기를 겪을 때의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기 어려워요. 아무리 이야기 해도 모르고요. 엄마의 소중함과 사랑을 느끼는 이야기예요. 가족들이 함께 와서 엄마를 위로하고 사랑해주면 좋겠어요. 나의 엄마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에요.엄마랑 같이 오세요.”(문희경)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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