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존중받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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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니 머잖아 여름 같은 봄이 시작될 기미다.
하루의 대부분을 진료실에서 보내는 내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알록달록한 봄꽃보다는 철마다 찾아드는 온갖 문서수발이다.
새 직원은 당연히 경력조회가 끝나 입사했을 것이고, 내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이미 보건소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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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니 머잖아 여름 같은 봄이 시작될 기미다. 하루의 대부분을 진료실에서 보내는 내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것은, 알록달록한 봄꽃보다는 철마다 찾아드는 온갖 문서수발이다. 의무교육보고서 제출을 독려하면 연말이구나, 신설된 방사선교육을 들으라고 안내공문이 오니 3월이구나 하는 셈법이다. 조금 삭막하지만 내 현실이다.
매년 슬금슬금 늘어나는 의무교육과 각종 서류를 처리하다 보면, 내가 언제 공무원으로 취직했나 싶다. 본업에 열중해도 모자란 때에, 실효성이 의문인 문서들이 시간을 뺏으니 허탈하기도 하다. 매년 돌아오는 의료기관 성범죄 및 아동학대 범죄경력 조회 명단 공문도 그 중 하나다.
성범죄와 아동학대 범죄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대찬성이다. 단지 그 단호함의 대상이 왜 전자발찌를 끊고 재범을 일삼는 인면수심의 범죄자가 아니라, 대다수 선량한 의료인과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일반 국민인지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의료기관 종사자는 취업 시 기관장에게 범죄경력조회 동의서를 제출해 경찰서에서 범죄경력이 없음이 확인된 다음에 취업이 가능하다. 나와 같은 의료기관장은 개설 시 보건소에 범죄경력조회 동의서를 제출한다. 보건소에서 이력조회를 마친 다음에 개설허가를 내주며, 중간에 성범죄 등으로 처벌된다면 의료법에 의해 면허가 취소되므로 의료기관장으로 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왜 매년 당신 병원에 성범죄자 없느냐고 묻는 것일까?
새 직원은 당연히 경력조회가 끝나 입사했을 것이고, 내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이미 보건소에서도 알 수 있다. 범죄이력을 조회할 권한도 갖고 있다. 그런데 굳이 '해당사항 없음'을 엑셀문서로 되풀이 제출하라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 한번은 보건소장님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양쪽 업무력만 낭비하는 문서는 협력해 줄여가자 말씀드렸더니, 공무원이란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니 어쩔 수 없단다. 국회의원들이 불합리한 법을 고쳐나가길 기다려야 한단다.
의료인 면허취소법 확대 역시 불합리함을 말하고 싶다. 의료인은 사회통념상 이미 충분히 높은 윤리기준을 요구받고 있다. 의료법 제8조에 의거, 의료법 등 의료와 직무에 관련된 법률을 위반해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는 경우 면허가 취소돼 왔으며, 2012년부터는 아동·청소년 대상 및 모든 성범죄를 범하면 아동 청소년 보호법에 의거해 10년간 의료기관 근무가 제한되는 제도도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불운한 교통사고나 길에서 시비에 휘말리거나, 하다 못해 경영이 어려워 병원이 망해도 악질적인 범죄자로 간주되어 면허가 취소된다는 것이다. 법사위에서조차 '직무관련성이 없는 범죄를 결격사유 및 면허취소사유로 규정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직업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고, 법률사무전반에 독점적 지위를 가진 변호사에 비해 의사·약사는 경우가 다르므로, 모든 처벌에 대한 의료인 면허취소사유 강화에 신중한 재검토를 당부하였음에도 민주당은 막무가내다.
인명을 고의로 해친 강력범죄자나 파렴치한 성범죄자의 의료 배제는 당연히 동의한다. 그러나 법률 재검토 권고에도 불구하고, 차별적인 이중처벌로 헌법 위배적이라 평가되는 의료인 면허취소법 확대안을 다짜고짜 패스트트랙으로 본회에 상정시킨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는 입법 폭력이다.
법안의 실효성과 합리성 대신에 누군가 때려잡으면 스스로 정의로워진 듯한 만족감을 선택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 미워할 자를 던져준다고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나치독일의 광기를 경험한 마르틴 니묄러의 충고를 새겨듣자. 오늘은 의료인, 그 다음에는 또 누구일까? 나는 우리나라가 인간 존엄과 직업적 소명의식이 존중받는 사회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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