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인생] 한손엔 대본 한손엔 쟁기…“농사 덕분에 연기 내공 깊어졌죠”

서지민 2023. 3. 15. 05: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별별인생] (3) 농촌으로 간 대표 감초 배우 임현식
드라마 ‘전원일기’ 촬영지 양주에 둥지
어머니 꿈 위해 땅 일군지 어느새 50년
직접 키운 사과·상추 나누며 행복 더해
“조급함 버리고 매일 해내야 하는 밭일
배우로서 내실 다지는 데 큰 도움 됐죠”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명품 연기로 유명한 배우 임현식씨가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자신의 밭에서 겨우내 쌓인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있다. 양주=현진 기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선 순돌이 아빠로, <허준>에선 늘상 “홍춘이!”를 외치던 임오근 역할로 사람들에게 친숙한 배우 임현식씨(78). 주연을 빛나게 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감초 배우’ 임씨의 화려한 인생 2막은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서 펼쳐졌다. 숱한 사극 드라마를 섭렵한 이력답게 현실에서도 우리 전통한옥을 짓고 사과나무를 가꾸며 여유로운 삶을 사는 임씨를 만나봤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늬가 화려한 철제 대문이 열리자 멀리서 다섯살 아이만 한 큰 개가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온다. 임씨는 마당 건너편에서 “메리야, 이리 와” 하고 개를 부르며 환한 표정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메리를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가니 임씨가 사는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20여년 전 2년 반에 걸쳐 직접 지은 집이다. 집 앞에는 소나무 여섯그루가 고고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옛날에 드라마 <전원일기>를 본 사람이라면 이곳이 익숙할 수도 있어요. 이 땅이 허허벌판일 때 2∼3년 동안 여기서 촬영했거든요. 집은 나중에 내가 어머니하고 같이 살려고 지은 건데 아주 멋있죠? 목수들이 일일이 나무 손질하고 마루를 이을 때 옆에서 이것저것 참견하며 늘 붙어 있었어요.”

임씨는 어머니의 오랜 꿈을 이뤄드리려고 귀농생활을 시작했다. 6·25전쟁 때 남편과 생이별하고 혼자서 자녀를 키운 임씨 어머니는 노년만큼은 농촌에서 보내길 바랐다. 임씨는 그런 어머니와 함께 1973년 양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농사를 돕기 시작했다. 젖소 5마리를 분양받아 우사를 짓고, 3300㎡(1000평) 규모 의 밭에 소에 먹일 옥수수를 가득 재배했다.

“어머니는 버릇처럼 ‘땅은 생명의 젖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허리가 굽고 다리가 다 휘도록 일만 하셔서 화를 내면서라도 힘든 일 못하게 말렸는데 듣질 않으시더라고요. 땅에서 새 생명이 움트고 나날이 쑥쑥 자라는 걸 보는 게 어머니껜 힐링이었던 거죠.”

임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농사일을 물려받았다. 어머니가 했듯 임씨 역시 재래식 농사를 고수한다. 쟁기질하고 삽으로 일일이 고랑을 냈다. 여력이 되지 않아 소를 키우는 것은 그만뒀지만 밭에 상추·토마토·오이를 키우고 사과나무 10여그루를 관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어깨너머 배운 농사일이 전부였던 임씨에게 홀로 꾸려나가는 귀농생활은 쉽지 않았다. 처음엔 농약을 뿌리다 지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방송 스케줄과 수확 시기가 겹쳐 한해 농사를 모두 망친 적도 여러번이다. 하지만 수년간의 실패 경험이 쌓여 농사짓는 규모는 작아도 기술만큼은 뒤지지 않는 농사꾼이 됐다. 연예계 친구들을 불러 모아 직접 키운 채소로 한상 차려 대접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주말엔 자녀들이 찾아와요. 내가 십수년 전 어머니한테 그랬듯 이젠 애들이 나한테 일 좀 그만하라고 말려요. 그런데 입장이 바뀌어보니 이제야 어머니 마음이 이해되더라고요. 농촌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은 힘들다기보다 치유되는 경험이에요.”

임씨는 농사를 지으며 배우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젓한 농촌마을에서 연기 공부를 하는 것이 도움 될 때도 많다. 한페이지 가득 쓰여 있는 긴 대사를 외울 때 도시에선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나 화려한 불빛 때문에 집중이 깨지기 일쑤였다. 농촌에선 귀찮게 하는 것들이 없어 한순간 몰입하기 좋다. 또 몸을 만드는 등 극 중 역할에 몰입해야 할 땐 한달이고 두달이고 여유를 가져야 하는데 그 짧지 않은 기간에 농사일을 하니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연기란 오랜 내공이 필요한 겁니다. 조급하게 굴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내실을 쌓을 수 있었던 건 매일매일 해내야 하는 농사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젠 짬 나는 시간에 연기학원에서 강의도 하면서 활동 영역도 넓히고 있죠.”

그는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농촌의 낭만만 바라보고 오면 큰코다친다”라며 “일도 힘들고 배워야 할 기술들이 많다”고 조언했다. 그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번 일이 손에 익고 애정을 갖게 되면 다시 빠져나오기 힘든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작물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도 느낄 수 있는 귀농이 되려면 철저히 준비하는 길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