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군부에 맞선 시민들… 약탈당한 민주주의 담다

최승영 기자 2023. 3. 14.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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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군부 쿠데타 2년… 미얀마 '봄의 혁명' 취재
허경주 한국일보 하노이 특파원·박고은 PD

한국일보 허경주 기자와 박고은 PD는 지난 1월29일 미얀마에 들어갔다. 이날 새벽 도착한 태국 방콕에서 차로 7~8시간을 달려 강 하나를 건너면 나라가 바뀌는 국경도시 매솟에 이르렀다. “전투상황이 정리되지 않아” 다음날 입국하기로 했다가 “지금밖에 되지 않는다”는 급보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배를 탔다.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모에이강을 가로지른 2~3분, 첫 발을 디딘 미얀마 카렌주에선 “지프차를 타고 완전무장을 한 5명의 군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무너뜨린 군부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우는 미얀마 시민들과 2월4일까지 동행한 4박5일, 총 열흘 여정의 시작은 그랬다.

허 기자와 박 PD는 지난 10일 기자협회보와 전화·대면 인터뷰에서 “(군부에) 잡히면 위험하다는 건 알았지만 전쟁 한복판에 들어간다는 게 와닿진 않았는데, 마중 나온 시민군이 모두 총을 가진 모습을 보니 실감이 났다”며 “묵었던 마을에 다음날 폭탄이 떨어져 사람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정이 안 바뀌었으면 그날 마을을 방문하게 돼 있었다. 운 좋게 무사히 돌아왔지만 함께 웃으며 얘기 나눈 누군가가 희생됐을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허경주 하노이 특파원과 박고은 PD는 쿠데타 2년을 맞아 지난 1~2월 미얀마를 방문, 군부에 맞서 ‘봄의 혁명’ 중인 시민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취재했다. 미얀마 카렌주 깊은 밀림까지 들어가 미얀마 시민군의 저항을 살핀, 국내 언론 첫 시도다.취재 기간 허 특파원(왼쪽부터)과 박 PD가 시민군과 사진을 찍은 모습. /한국일보 제공

두 기자·PD는 기획 <쿠데타 2년, 미얀마에 가다>로 미얀마 시민방위군(PDF)과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학생군의 상황을 전했다. ‘약탈당한 민주주의 되찾으려 엄마도 총을 들었다’ 기사를 비롯한 총 10건의 르포·인터뷰, ‘“이런 나라를 물려줄 순 없잖아요” 살아있는 박종철·이한열을 만나다’를 포함한 유튜브 영상 3건 등을 냈다. ‘30대 싱글맘’ ‘바이올리니스트’, ‘대학생’, ‘자영업자’, ‘학생군’, ‘PDF 사령관’ 등 민주주의를 지키려 군인이 된 시민들의 얼굴과 목소리, 개개인의 이야기와 태도가 핵심이다. “차로 8시간을 밀림”에 들어가 “외신기자를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 “카메라를 세팅하고 25명, 카메라 없이 35명”에게 얘길 들었다. “어두울 때 시작해서 밝아졌다가 다시 깜깜해질 때까지 담은” 영상용량만 ‘1테라’에 달한다. 2021년 2월1일 쿠데타 후 국제사회 전반의 무관심 속에 군부가 공포정치를 자행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저항을 이만큼 상세히 전한 사례는 없었다.

허 기자는 “PDF 백호부대를 만나고 미얀마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탄케 ABSDF 의장을 인터뷰한다는 것 말곤 정해진 게 없었다. 통역을 통해 사연을 듣고 인터뷰 대상을 판단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만큼 모든 분들이 적극 임해주셨다. 마을이나 초소에 가면 예상 못한 분들까지 ‘나도 할 말 있다’고 나서 주셔서 깊은 간절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어 “밀림 속이라 지붕이나 벽이 없는 원두막 같은 데서 잤는데 밤마다 저와 비슷하거나 어린 분들이 잠자리로 제일 좋은 곳을 양보한 거였다.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던 분들이 ‘난 군인이라 괜찮다’고 ‘잘 알려만 달라’고 하는데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군인 복장을 빼면 조용한 마을에 온 인상이었다. 인터뷰나 영상·사진촬영 땐 진지했지만 이외 모든 곳에선 인증샷 요청이 이어지며 “군인, 주민들과 평생 찍을 사진을 다 찍은 것 같았다. 학생군 지역에선 거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기분이었다.” 박 PD는 “20대 친구와 학생군 숙소를 같이 썼는데 팝송을 듣고 친언니와 깔깔거리고 저희와 블랙핑크 얘기도 하고 여느 20대와 다르지 않았다. 20대 초반 친구들이 진지하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하고 심지어 뉴질랜드 국적자가 시민군에 참여한 모습을 보며 ‘나는 못할 것 같은데’란 생각과 동시에 지금 미얀마가 1980년대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과 다르지 않고 이 사람들이 미얀마의 박종철, 이한열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취재는 쿠데타 2년을 맞아 “군부 집권 후 삶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 도시지역 양곤을 방문해 시민들을 만나보겠다”는 허 기자의 생각에서 시작됐다. 전문가들에게 취재비자를 받기 불가능하고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도시보다 외곽 지역을 알아보라”는 조언을 들으며 방향을 수정했다. 이후 국내에 미얀마 상황을 알리는 활동 중이고 시민군과 연락이 되는 이주노동자이자 운동가를 통해 취재 가능한 단체를 수소문했고 답이 빨랐던 두 곳을 방문하게 됐다. 전황에 따라 일정이 수차례 바뀌었고 취재지역을 알게 된 통역자가 거절하며 급히 새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한국어 기사보다 영상이 미얀마 상황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회사에 요청했고, 마침 “협업 차례였고 욕심도 났던” 박 PD가 흔쾌히 응하며 함께 비행기를 타게 됐다.

2011년 입사해 여러 부서를 거쳤고 미얀마 취재를 시작으로 지난달 베트남 하노이 특파원에 부임한 기자, 2015년부터 한국일보에서 영상을 만들었고 현재 기획영상팀에서 ‘h알파’ 영상 제작을 하는 PD는 잘 모르던 사이였다가 이제 ‘전우’가 됐다. 3년 특파원 임기가 끝날쯤 다시 가자고 약속도 한 상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를 비롯해 1980년대 독재정권 저항 역사엔 외신의 자리가 있었다. 이번 보도는 40년이 흘러 민주주의를 위한 타국의 항거에 우리가 외신이 된 사례다. 두 언론인은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의 길에 일반 시민들이 독재자 이름을 알 정도로 미얀마에선 큰 관심과 의미를 두고 있다. 상당히 겹쳐보이는 역사는 우리가 타국보다 관심 가질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또 “3년 뒤엔 평화로운 미얀마에서, 밀림이 아니라 도시와 대학에서, 진짜 20대의 모습으로 보자던 시민군과 나눈 대화가 이뤄졌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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