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군가의 꿈속 존재일지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력 버무렸죠”

김용출 2023. 3. 1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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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SF소설집 ‘빛과 영혼의 시계방’ 펴낸 김희선 작가
‘공간 서점’ 등 SF 단편소설 8편 묶어
시간여행 등 다양한 세계관 배경으로
태엽처럼 작동하는 정교한 서사 눈길
시공간 뛰어넘는 마법같은 판타지에
노동권 등 현실 문제도 예리하게 접근
젊은작가상·이상문학상 등 수상 경력
현직 약사… “소설 창작에 시너지 효과”

저 안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지만, 오륙 년 전만 해도 원주에서 씨도로를 이용해 차로 퇴근할 때면 구도심을 지나곤 했다. 옛 원주역 건너편에 위치한 구도심에는 시계방을 비롯해 가게들과, 이들 가게에서 일하며 오랫동안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시계를 수리하는 시계방 노인, 면장갑을 쓰고 구두를 수선하는 구두 수선공, 작은 도구를 이용해 도장을 파주거나 열쇠를 파주는 아저씨….
현직 약사인 소설가 김희선이 세 번째 소설집이자 첫 SF소설집을 펴냈다. 그는 ”이전 소설집에 SF적 요소가 많은 작품이 다른 소설과 함께 묶여 있어서 조금 낯설었겠지만, 이번에는 아예 SF소설집으로 묶여 나와서 작품이 더 깊게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웃었다. 허정호 선임기자
소설가 김희선은 구도심의 오래된 가게나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을 볼 때마다 호기심이 발동되곤 했다. 도장을 새기러 갈 때면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 기억하려고 애썼다. 상상도 자주 했다. 오랫동안 혼자 일하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혼자 알고 있진 않을까. 자녀나 가족이 모르는 사연이 있진 않을까. 만약 어느 날 이들이 사라진다면….

어느 날, 오래된 가게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엉뚱한 상상력이 더해졌다. 만약 공기압으로 움직이는 기압 운송선을 실제로 만들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압 운송선은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해 압력 차이를 없애려고 하는 공기 성질을 이용한 구상으로, 지하철이 상용화되기 전인 100여 년 전 유럽에서 제작이 시도됐다가 실패한 바 있다. 만약에 기압 운송선이 빛보다 빨리 달려서 시간까지 거슬러 가게 된다면….

시간 여행자가 된 시계공 아버지와, 그의 사연을 모르는 자식의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김희선의 단편SF ‘공간 서점’은 구도심의 시계방에서 걸어 나왔다. 실종된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사설탐정이 과거 천금당으로 불린 시계방이었던 고서점을 찾아온다. 시계방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쫓겨 가게로 들어온 청년으로부터 무언가 만드는 법이 담긴 책을 건네받지만, 청년은 가게를 나선 뒤 최루탄 파편에 맞아 쓰러진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사라지고, 시계방 자리에는 ‘공간 서점’이란 중고 책방이 자리해 있다. 책방 주인 청년은 찾아온 사설탐정에게 말한다.
“혹시 세상에 길은 한 갈래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고 지금 이곳도 그중 하나일 뿐이지요. 길이 반드시 한 갈래로만 뻗어 있다고 믿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40-43쪽)
현직 약사인 소설가 김희선이 ‘공간 서점’을 비롯해 단편SF 8편을 묶은 SF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허블)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이자 첫 SF소설집.
작품들은 양자론적 다세계론이나 시뮬레이션 우주론, 시간 여행이나 마인드 업로딩 등 다양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한국사와 세계사는 물론 현실의 여러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간관을 가진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 다른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치 태엽처럼 맞물려 정교하게 작동하는 서사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째깍째깍.
김희선이 이번 SF소설집에서 그린 세계는 어떤 모습이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갈까. 김 작가를 지난 2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공간 서점’의 시계공 아버지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소설의 과학적 배경은 어떤 하나의 이벤트가 일어날 때마다 우주가 계속 갈라진다고 하는 양자론적인 다세계 같은 것이다. 시계공 아버지가 과거로 돌아가 청년을 대신해 최루탄을 맞았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죽은 우주가 있을 수 있고, 아버지가 살아남은 우주 역시 있을 수 있다. 의뢰인이 차 안에서 깜빡 졸 때 아버지가 문을 두드린 건 아버지가 산 우주에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각각 다른 우주가 어떤 이유로 잠깐 통로 같은 게 열려서 아버지가 자식이 잘 지내는지를 잠시 확인할 수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열어두고 싶었다.”

역시 시계방을 모티브로 한 ‘가깝게 우리는’은 글쓰기 수업 강사인 ‘나’가 가스 폭발로 자살한 노인이 수강생 김진수였음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노인 김진수는 자신이 노동권을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을 자동인형으로 교체하기 위해 스위스로 파견됐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노인은 자신조차 인간이 아닌 자동인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독자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노동이나 일하는 환경에서 압박받는 오토마톤이 있을 수 있고, 미디어나 SNS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될 것 같아서 끌려가는 오토마톤이 있을 수 있다.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조금 다른 시각으로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울러 과거에 이런 일,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한 번 더 환기하고 싶었고, 뭔가를 잊지 않고 기록하고 싶은 느낌도 있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가 특별히 추천한 ‘꿈의 귀환’은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꾼 꿈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꿈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꿈의 지도를 위한 과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는 도중, 이론 물리학자 앨런의 강연에서 놀라운 반전을 맞는다.
―앨런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홀로그램 우주라면 우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쩌면 어떤 사람의 꿈일 수 있다는 가정은 보르헤스의 소설을 비롯해 자주 등장한다. 저는 그 꿈의 주체를 유리 가가린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리가 꿈속의 존재라고 하더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존재할 가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란 김희선은 단편 ‘교육의 탄생’으로 2011년 ‘작가세계’ 신6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라면의 형제’, ‘골든 에이지’, 장편소설 ‘무한의 책’,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등을 펴냈다.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SF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병원에서 관리 약사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데.

“하루를 풀로 근무하는 것도, 근무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아주 힘들진 않다.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입원 환자의 약을 조제하거나 향정신성 의약품이나 마약류 관리. 관리 약사의 일과 소설 창작이 서로 완전히 달라서 오히려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다. 소설가의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고 창의적인 쪽이라면, 약사 일은 매우 정확하고 엄밀해야 한다. 약사 일을 규칙적으로 함으로써 소설을 쓰던 머리를 식힌다면, 소설을 쓸 때는 몰입해 상상하며 쓰니까 약사로서의 정해진 일을 식히게 된다. 어렵다기보단 서로 좋게 작용하는 것 같다.”

절대로 실수 없이 정확하게 조제해야 하는 약사의 일과,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확하게 산책했다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일화에서 이름을 따온 강아지 칸토를 꾸준하게 산책시키는 일 사이에서, 마치 시계처럼 정확한 김희선의 소설들은 태어난다. 째깍째깍∼.

정확한 약사의 일과 꾸준한 칸토의 산책이 모두 끝난 뒤에, 또는 근무 시간이 바뀌어서 반대 순서로 정확히 이뤄진 뒤에, 그는 저녁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의 세계를 찾아 나설 것이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세계를. 책 속으로 뛰어든 ‘네버엔딩 스토리’의 소년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처럼. 그리하여 소설가 김희선의 원주 집에선 밤마다 정확한 소설의 시계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째깍째깍~ 째깍째깍~.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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