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보기술 전쟁터에서 ‘뒷배’ 약했던 한국 기업[이코노믹 뷰]

기자 2023. 3. 1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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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주 에프엔에스벨류 CEO

신기술을 둘러싼 경쟁은 분초를 다투는 현대판 ‘땅(시장) 따먹기’다. 세계 초유의 기술을 개발한 벤처기업이라 해도 국내시장에서는 자본과 인적자원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대기업과, 글로벌 시장에서는 세계 곳곳에 깃발을 꽂은 정보기술(IT) 공룡기업들과 벌여야 하는 땅 따먹기 경쟁은 버겁기만하다. 시장을 둘러싼 첨예한 경쟁은 비단 기업 간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자국 기업의 시장을 지켜내기 위한 국가 차원의 팽팽한 대립은 마치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방불케 한다.

지난 2월21일부터 2주간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ITU-T(국제전기통신연합 전기통신표준화부문) SG17(정보보호연구반)회의가 열렸다. ITU는 유엔 산하의 정보통신기술(ICT) 전문기구로 ITU-T SG17은 사이버보안 분야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정보보호기술과 관련한 국제표준(international standardization)을 총괄하는 연구반이다. 연 2회 개최되는 회의에서는 각국 기업 및 연구기관 등이 제출한 기술의 세계 표준화를 위한 심사와 승인이 이뤄진다.

필자는 블록체인 기반 패스워드리스 보안인증 솔루션의 세계 표준화에 도전장을 던지며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평화의 상징인 유엔 산하기관에서의 회의 분위기는 평화와는 사뭇 달랐다. 표면적으로는 예우를 갖춘 토론과 의견 개진이 이뤄졌지만, 한 겹 더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지금 국제정세의 복사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살벌하게까지 느껴졌던 회의장 분위기에, 제3차 세계대전은 기술전쟁이란 이름으로 이미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가 시쳇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제대로 맞은 것은 우리가 제출한 보안인증 솔루션을 검토하는 미팅에 예정에도 없던 미국 대표단이 등장할 때였다. 솔루션의 코어기술을 기준으로 분산원장기술 부문으로 제출한 기술 기고문에 인증(authentication) 기술을 검토하는 미국, 영국 국가 대표단이 참석하면서 미팅 분위기는 두 나라가 주도했다. 자국 기업이 점령하고 있는 시장을 한국기업이 잠식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리뷰 회의에서는 미국과, 미국의 우방임을 노골적으로 자처하는 영국 대표단이 날선 발언을 이어갔다. 또 다른 회의에서는 미·러 간 팽팽한 대립이 ‘볼만한 설전’으로 참석자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다.

정보보호와 관련한 세계 표준화를 관할하는 SG17의 미팅이 이처럼 치열하고 핫(?)한 데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원격근무가 일상이 되면서 제3의 장소가 일터가 되는 미증유의 일하는 방식은 수많은 불청객을 양산했다. 국가, 기업 할 것 없이 해커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허술했던 보안이 곳곳에서 도마에 올랐다. 팬데믹은 IT산업, 특히 보안시장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었고, 보안은 국가를 막론하고 중요한 사회경제적 어젠다로 대두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안과 관련해 세계 표준화를 노리는 기업들의 도전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

특정 기술이 세계 표준이 된다는 것은 각국 정부(당국)에서 가이드라인으로 권고하는 기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깃발을 먼저 꽂는 자가 승자가 되고, 세계 표준화는 근사한 깃발 꽂기의 시작점이 된다. 따라서 각국 대표단은 전문가로서 범국제적인 시각으로 기술 심사에 임하겠지만 자국 기업의 밥그릇 챙기기를 등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치열한 기술전장에서 우리나라 정부 대표단의 목소리는 자주, 그리고 크게 들을 수 없었다. 물론 SG17 미팅에 국한된 개인적 의견이지만 미·영·일, 러시아의 쟁쟁한 세력 과시나 다툼이 부러웠던 것은 참석한 한국기업 관계자들 중 필자만의 생각일까.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IT 강국이며, 금번 SG17 회의에도 중국 다음으로 많은 기고문을 제출한 나라다. 국제회의인 만큼 정부 대표단의 외교력이 자국 기업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기에 ‘한국의 입김’을 기대했지만, 개인적 욕심에 그친 것같아 못내 아쉽다. 반면에 위로가 되는 큰 성과도 있었다. 저개발국 디지털 뱅킹 기술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ITU 내 ‘FIGI DFS 랩’으로부터 보안인증 솔루션 샌드박스 추진을 제안받았다. 미국 기업 ‘피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다.

올해 두 번째 SG17 국제회의는 오는 8월 한국에서 개최된다. 뜨거운 여름에 더욱 뜨겁게 벌어질 홈그라운드에서의 국가 간 ‘설전’에서는 든든한 ‘뒷배’를 기대해본다.

전승주 에프엔에스벨류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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