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청년' 박서보 "암에 지지 않고 더 그릴 것"

이선아 2023. 3. 1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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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3기란 걸 처음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어쩌자고 이런 형벌을 주나'란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제가 가진 재주 중 하나가 빨리 단념하는 겁니다. 암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하던 일에 더 집중하기로 했죠. 그래서 방사선 치료를 당장은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14일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 JW메리어트 제주 리조트 앤 스파에서 만난 박서보 화백(92)이 건넨 얘기는 언뜻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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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거장' 이름 내 건 박서보미술관 제주에 착공
폐암 3기 진단후 첫 간담회
"왜 이런 형벌 주나 싶었지만
암과 친구처럼 지내기로 맘 먹어
하던 일에 집중하려 치료 미뤘죠"
세계적 건축가 메니스가 설계
"박서보 위한 영원한 집 될 것"
자연 경관 해치지 않기 위해
건물 올리지 않고 밑으로 파
박서보 화백이 14일 제주 서귀포시에서 열린 박서보미술관 착공식에 참석해 미술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JW메리어트 제주·기지재단 제공


“폐암 3기란 걸 처음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어쩌자고 이런 형벌을 주나’란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제가 가진 재주 중 하나가 빨리 단념하는 겁니다. 암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하던 일에 더 집중하기로 했죠. 그래서 방사선 치료를 당장은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14일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 JW메리어트 제주 리조트 앤 스파에서 만난 박서보 화백(92)이 건넨 얘기는 언뜻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구순이 넘은 나이인데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하지 않나, 앞으로 할 일이 많다면서도 ‘당장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니…. 한 시간 남짓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수수께끼가 풀렸다. 박서보는 구순에도 ‘영원한 청년’이고,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수두룩한데, 치료를 시작하면 당장 일을 못 하니, 치료를 미룬다는 얘기였다.

 ○자연에 스며드는 ‘박서보의 집’

전시장 콘셉트


지난달 23일 SNS를 통해 폐암 3기란 걸 밝힌 박 화백이 공개석상에 나온 건 이날 JW메리어트 제주 부지에서 첫 삽을 뜬 ‘박서보미술관’(가칭)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에 알린 거장’이자 ‘국내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박 화백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기는 건 이게 처음이다.

박서보의 예술인생은 수신(修身), 그 자체였다. 평생을 수도승처럼 매일같이 연필을 들고 선을 그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와 동료들이 갈고닦은 단색화는 2010년대 초부터 세계가 알아보기 시작했다.

페르난도 메니스

내년 여름에 완공될 박서보미술관은 이런 그의 예술인생이 담긴 공간으로 꾸며진다. 설계를 맡은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는 “박서보미술관은 박 화백을 위한 ‘영원한 집’이 될 것”이라며 “자연을 중요시하는 박 화백의 작품세계를 건축물에 녹일 계획”이라고 했다. 메니스는 ‘손상된 것을 회복한다’는 철학을 지닌 세계적인 건축가다. 부서진 벽돌을 활용해 만든 폴란드 CKK 조단키 콘서트홀이 그의 대표작이다.

메니스 건축가의 설명대로 박서보미술관은 설계 단계부터 ‘자연과 어우러져야 한다’는 박 화백의 예술철학을 반영했다. 위치부터 그렇다. 제주 올레 7코스와 맞닿는 곳에 들어선다. 제주 남쪽 앞바다가 미술관을 감싸는 형태다. 건물은 지상 1층(로비), 지하 1~2층(전시관)으로 이뤄진다.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위로 건물을 올리기보다 밑으로 파는 방법을 택했다.

 ○“마음속 응어리 푸는 곳 됐으면”

박서보미술관 조감도


전시관도 마찬가지다. 흰 벽으로 둘러싸는 ‘화이트 큐브’ 방식의 전시실이 아니라 자연광이 비치는 ‘선큰(sunken)’ 구조를 도입했다. 관람객들이 자연 속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박서보미술관은 투숙객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개방할 계획이다.

미술관 내 정원에는 제주에서 나는 토착 식물을 심을 계획이다. 메니스 건축가는 “제주 현무암과 콘크리트를 섞은 재료를 활용해 미술관 표면에 차가운 느낌을 지우고 따뜻한 분위기를 구현할 수 있도록 설계할 예정”이라고 했다.

박서보미술관의 또 다른 키워드는 ‘치유’다. 박 화백은 “관람객들이 내 그림을 본 뒤 ‘응어리가 풀렸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서양미술을 보면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관람객에게 잔뜩 토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예술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림을 통해 나 자신을 비우고, 보는 이는 치유되길 언제나 바랍니다. 박서보미술관을 찾는 모든 사람이 자연, 예술과 함께 호흡하면서 치유의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제주=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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