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오작동으로 모래폭풍이 벚꽃처럼 '아름다운 오류'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3. 14.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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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작가 학고재 개인전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
디지털 노이즈 이미지 변주한
회화 설치 영상 등 40점 망라
'수직적 시간'. 【사진 제공=학고재】

'포스트 단색화'의 세계를 탐구했던 지난 1~2월 '의금상경(衣錦尙絅)' 전시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가는 박종규(57)였다. 동양적 미를 추구하는 단색화의 향연 속에서 박종규는 컴퓨터그래픽으로 출력한 이미지에 붓칠을 더한 기하학적 추상화를 내걸었다.

아트바젤 홍콩과 광주비엔날레 개막이 이어지는 '아시아 아트 위크'에 선보일 학고재 갤러리의 대표 주자로 이 혼종의 작가가 선택됐다. 작년 전속 작가가 된 그의 개인전 '시대의 유령과 유령의 시대'가 15일부터 4월 29일까지 열린다. 학고재 본관과 신관 전체를 회화, 조각, 영상 등 신작 40점으로 풍성하게 채운다. 전시를 기획한 이진명 미술평론가는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의 '우리의 시대는 유령의 시대'라는 말에서 차용한 제목"이라고 설명했다.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세계 미술계 인사들이 한국을 대거 찾는 기간에 선보일 작가 선정에 고심했다. 한국색을 보여주면서도 세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작가로 박종규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오랫동안 모색해온 작가다. 컴퓨터, 네트워크, 인공지능 등을 이 시대의 키워드로 삼고 컴퓨터 화면에 발생하는 노이즈에 주목해왔다. 노이즈는 디지털 세계를 작동케 하는 시그널, 그리고 소통을 방해하는 잉여물로 여겨진다. 이 부정적 신호를 수집해 캔버스로 옮겼더니 정연한 아름다움으로 물화했다. 13일 만난 작가는 "노이즈야말로 휴머니즘을 보장하는 보루"라고 주장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본관과 신관에 대거 걸린 '수직적 시간'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본 것 같은 비처럼 내리는 노이즈를 시각화한 작품. 컴퓨터로 작업한 이미지를 시트지 커팅기로 잘라 화폭에 붙이고 물감을 칠해 완성한다. 인쇄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4~5겹의 중첩된 레이어가 숨어 있다.

작가는 "대학 시절부터 입체와 평면, 과거와 현재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변주된 '수직적 시간'은 보는 각도에 따라 평면이면서도 입체인 것처럼 보인다. '수직적 시간' 중 일부는 직사각형을 벗어난 비정형으로 목재 캔버스를 짠 비정형 회화 연작으로 변주되고, 적색 회색 등 색채 변화도 일어난다. 이 평론가는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사유로 추상회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본관에서 추상화를 다채롭게 걸었던 작가는 신관에서는 완전히 다른 작업을 보여준다. 수직의 노이즈 대신 만발하는 벚꽃처럼 보이는 분홍, 하늘색의 모래폭풍을 그린 회화와 이를 영상으로 구현한 작업을 만나게 된다. 작년 2월 대구의 한 빌딩 전광판에서 영상 작품을 상영했던 저자는 전광판에 오류가 발생해 모래폭풍이 분홍색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벚꽃을 연상시키는 회화가 탄생한 사연이다.

지하 1층에서는 소리꾼 민정민의 판소리 '심청가'가 울려퍼진다.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뜨게 되는 장면을 구슬프게 부르는 절창이 상영되는 영상 앞에 관람객의 모습이 20초 지연된 이미지로 투사된다. 작가는 "미술의 시작은 언제나 서양이었는데 우리의 것도 시작이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전통예술을 선택했다. 이 소리의 파장을 회화로 바꾸는 작업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지하 2층 전시의 종착점은 질서정연하게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는 노이즈를 그린 초대형 '수직적 시간'을 5점 나란히 건 연작이다. 이 평론가는 "수직적 시간이란 시적인, 예술적 시간을 의미한다.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의 수평적 시간을 살면서 예술을 만날 때 살아갈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수직적 시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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