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미술관’ 제주서 착공···“마음 속 응어리 치유하는 미술관 기대”
박 화백 “방사선 치료 안받고 새 작업 시작” “개관일에도 함께하고 싶다”
내년 여름 개관···작가 예술철학 반영해 제주 자연과 동화되는 미술관 설계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이자 ‘단색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박서보 화백(92)의 이름을 딴 ‘박서보미술관’(가칭) 착공식이 14일 제주 서귀포시 ‘JW메리어트 제주 리조트&스파’ 부지에서 열렸다.
내년 여름 완공 예정인 박서보미술관의 설계는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72)가 맡았다.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이 보이는 서귀포시 호근동에 들어서는 박서보미술관은 지상 1층, 지하 2층 건물로 대지면적 1만2137㎡, 총 건축면적 1만1571㎡(전시관 면적 900㎡) 규모다.
이날 기공식에 참석한 박서보 화백은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미술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여기 와서 그림을 보고 나면 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려 치유되길 바란다”며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미술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동시대 같이 활동한 좋은 작가들의 전시를 통해 한 시대의 연대성 같은 것도 강조하고 그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폐암 판정 사실을 공개해 미술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는 박 화백은 관련 소회도 담담히 털어놨다. 그는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하라고 이런 형벌을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처음 2~3일 흔들리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작업을 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도 받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암을 친구로 모시고 함께 산다고 생각하고 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박 화백은 최근 몸 상태에 맞춰 새로 시작한 작업도 소개했다. “외국의 오래된 신문지 위에 연필과 유화로 드로잉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과거에 했던 작업인데,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 일상적인 일을 다 잊고 집중하기 위해 그렇게 선택했다. 빨리 안 데려가 주면 일을 충분히 해내고선 죽을 텐데…. 그런 기대감 하나 믿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미술관과 관련, 박 화백은 “호텔 측에서 미술관 건립 제안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뻤다”며 “미술관 위치는 아주 좋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 미술관이 꼭 커야만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커다란 미술관에 지지 않는 미술관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화백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감격스럽고 영광스럽다. 자연과 나, 그리고 작품이 하나되는 경험을 상상하니 창작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며 “미술관을 개관하는 그날에도 이 과정에 참여하신 모든 이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해 주변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박서보미술관’은 건축 설계부터 자연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온 박 화백의 예술철학을 적극 반영해 세워진다. 제주의 자연적인 빛과 바람, 물을 건축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등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동화되도록 함으로써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박 화백의 작품세계를 경험하고 공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지하 2층에 자리할 전시실까지 자연광이 닿을 수 있도록 선큰(sunken) 구조를 도입한다. 미술관 내외부 경관도 제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재료가 사용되며, 정원도 토착식물로 꾸며 제주의 지역적 특성을 드러낼 예정이다. 벽체 마감은 메니스가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피카도(Picado) 기법을 활용한다. 이 기법은 콘크리트와 깨진 벽돌을 섞어 만든 새로운 유형의 콘크리트로 콘크리트의 차가운 느낌 대신 평안한 분위기가 강점이다. 박 화백은 지난해 6월 메니스의 설계안을 보고 “그의 건축 작품들을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이다 싶었다. 우리 둘은 좋은 궁합”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서보미술관은 박 화백이 2019년 세운 비영리 재단법인인 ‘기지재단’이 운영한다. 기지재단 측은 이날 “미술관의 정식 명칭과 운영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고 있다”며 “개관과 함께 상설·기획 전시, 교육과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박서보미술관은 박 화백의 고향인 경북 예천군의 ‘예천군립 박서보미술관’, 서울 종로구의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이란 명칭으로도 설립이 추진 중이다. 박 화백은 이날 “예천미술관은 건립이 추진됐으나 설계를 둘러싼 문제 등으로 지금은 거의 포기 상태”라고 밝혔다.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은 서울 평창동에 세워질 예정이다. 박 화백의 집이자 작업실·전시공간이 있는 서울 연희동 ‘박서보의 집’ 옆에는 박 화백이 평생 수집한 회화와 도자기·벼루 등 컬렉션과 생전 사용한 각종 물품을 전시할 ‘박서보기념관’도 세워진다. 현재 연희동 ‘박서보의 집’은 기지재단이 일반인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제주 저지리의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는 작업실 겸 전시공간이 있다.
박 화백은 최근 모교인 홍익대 후학들을 위해 ‘박서보장학재단’을 세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 광주비엔날레 개최 때마다 참여 작가들 중에서 선정해 시상하는 ‘광주비엔날레 박서보예술상’도 올해 처음 시상될 예정이다. 기지재단 관계자는 이날 “박서보장학재단과 연동해 인재 양성 프로그램, 젊은 창작자들의 작품 활동 및 전시 지원 등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잠깐 멈춘 비, 내일부터 ‘최대 40mm’ 다시 쏟아붓는다
- [단독]“의병은 폭도” 문서, 이완용이 준 친일 훈장 ‘경찰 역사’로 전시한 경찰박물관
- [단독] 허웅 전 연인, 변호인 선임 법적대응 나선다
- 대통령실 “채 상병 죽음보다 이재명 보호···의도된 탄핵 승수 쌓기”
- 시청역 돌진 차량, 호텔주차장 나오자마자 급가속···스키드마크 없었다
- 국민의힘, 무제한토론서 “대통령 탄핵법” 반발…첫 주자부터 국회의장에 인사 거부하며 신경
- 보행자 안전 못 지킨 ‘보행자용 안전펜스’
- 영화 ‘마션’처럼…모의 화성서 1년 생활, 토마토 재배도 성공
- 민주당, 윤 대통령 탄핵 청문회 검토…탄핵 국민청원 100만명 돌파
- 국민의힘, 한동훈 제안한 자체 채 상병 특검법 놓고 ‘금식’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