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미술관’ 제주서 착공···“마음 속 응어리 치유하는 미술관 기대”

도재기 기자 2023. 3. 1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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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재단·JW메리어트 제주 호텔, 기공식 열어
박 화백 “방사선 치료 안받고 새 작업 시작” “개관일에도 함께하고 싶다”
내년 여름 개관···작가 예술철학 반영해 제주 자연과 동화되는 미술관 설계
최근 폐암 판정 사실을 공개한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14일 제주 서귀포 JW메리어트 제주 호텔 부지에서 열린 ‘박서보 미술관’(가칭) 기공식에 환한 얼굴로 참석했다. 기지재단 제공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이자 ‘단색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박서보 화백(92)의 이름을 딴 ‘박서보미술관’(가칭) 착공식이 14일 제주 서귀포시 ‘JW메리어트 제주 리조트&스파’ 부지에서 열렸다.

내년 여름 완공 예정인 박서보미술관의 설계는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72)가 맡았다.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이 보이는 서귀포시 호근동에 들어서는 박서보미술관은 지상 1층, 지하 2층 건물로 대지면적 1만2137㎡, 총 건축면적 1만1571㎡(전시관 면적 900㎡) 규모다.

이날 기공식에 참석한 박서보 화백은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미술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여기 와서 그림을 보고 나면 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려 치유되길 바란다”며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미술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동시대 같이 활동한 좋은 작가들의 전시를 통해 한 시대의 연대성 같은 것도 강조하고 그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의 설계로 내년 여름 개관 예정인 ‘박서보 미술관’(가칭) 조감도. (C)Fernando Menis. 기지재단 제공

최근 폐암 판정 사실을 공개해 미술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는 박 화백은 관련 소회도 담담히 털어놨다. 그는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하라고 이런 형벌을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처음 2~3일 흔들리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작업을 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도 받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암을 친구로 모시고 함께 산다고 생각하고 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박 화백은 최근 몸 상태에 맞춰 새로 시작한 작업도 소개했다. “외국의 오래된 신문지 위에 연필과 유화로 드로잉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과거에 했던 작업인데,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 일상적인 일을 다 잊고 집중하기 위해 그렇게 선택했다. 빨리 안 데려가 주면 일을 충분히 해내고선 죽을 텐데…. 그런 기대감 하나 믿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미술관과 관련, 박 화백은 “호텔 측에서 미술관 건립 제안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뻤다”며 “미술관 위치는 아주 좋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 미술관이 꼭 커야만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커다란 미술관에 지지 않는 미술관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화백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감격스럽고 영광스럽다. 자연과 나, 그리고 작품이 하나되는 경험을 상상하니 창작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며 “미술관을 개관하는 그날에도 이 과정에 참여하신 모든 이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해 주변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박서보미술관’은 건축 설계부터 자연과의 관계를 중요시해온 박 화백의 예술철학을 적극 반영해 세워진다. 제주의 자연적인 빛과 바람, 물을 건축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등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동화되도록 함으로써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박 화백의 작품세계를 경험하고 공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지하 2층에 자리할 전시실까지 자연광이 닿을 수 있도록 선큰(sunken) 구조를 도입한다. 미술관 내외부 경관도 제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재료가 사용되며, 정원도 토착식물로 꾸며 제주의 지역적 특성을 드러낼 예정이다. 벽체 마감은 메니스가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피카도(Picado) 기법을 활용한다. 이 기법은 콘크리트와 깨진 벽돌을 섞어 만든 새로운 유형의 콘크리트로 콘크리트의 차가운 느낌 대신 평안한 분위기가 강점이다. 박 화백은 지난해 6월 메니스의 설계안을 보고 “그의 건축 작품들을 처음 봤을 때 이 사람이다 싶었다. 우리 둘은 좋은 궁합”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서보 화백과 ‘박서보 미술관’ 설계자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 박서보 인스타그램

박서보미술관은 박 화백이 2019년 세운 비영리 재단법인인 ‘기지재단’이 운영한다. 기지재단 측은 이날 “미술관의 정식 명칭과 운영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고 있다”며 “개관과 함께 상설·기획 전시, 교육과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박서보미술관은 박 화백의 고향인 경북 예천군의 ‘예천군립 박서보미술관’, 서울 종로구의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이란 명칭으로도 설립이 추진 중이다. 박 화백은 이날 “예천미술관은 건립이 추진됐으나 설계를 둘러싼 문제 등으로 지금은 거의 포기 상태”라고 밝혔다.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은 서울 평창동에 세워질 예정이다. 박 화백의 집이자 작업실·전시공간이 있는 서울 연희동 ‘박서보의 집’ 옆에는 박 화백이 평생 수집한 회화와 도자기·벼루 등 컬렉션과 생전 사용한 각종 물품을 전시할 ‘박서보기념관’도 세워진다. 현재 연희동 ‘박서보의 집’은 기지재단이 일반인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제주 저지리의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는 작업실 겸 전시공간이 있다.

박 화백은 최근 모교인 홍익대 후학들을 위해 ‘박서보장학재단’을 세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 광주비엔날레 개최 때마다 참여 작가들 중에서 선정해 시상하는 ‘광주비엔날레 박서보예술상’도 올해 처음 시상될 예정이다. 기지재단 관계자는 이날 “박서보장학재단과 연동해 인재 양성 프로그램, 젊은 창작자들의 작품 활동 및 전시 지원 등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연광을 끌어들일 ‘박서보 미술관’(가칭)의 지하 2층 전시실 예상 모습. (C)Fernando Menis. 기지재단 제공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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