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63>] 미래를 약속하는 건 그토록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박혜진 문학평론가 2023. 3. 1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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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당신의 질문에 ‘나중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하자. 어떤 기분일까. 말 그대로 훗날을 기약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온건한 방식으로 거부당했다고 이해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부모님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나중에’였던 것 같다. 갖고 싶은 것을 사 달라고 조르면 어머니는 항상 나중을 기약했다. 나중이라는 말은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약속을 무(無)의 상태로 돌려놓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 나중이란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여름 별장, 그 후’는 독일의 소설가 유디트 헤르만의 데뷔 작품이다. 엇갈린 감정과 쉽사리 독해되지 않는 심리 묘사가 압권인 단편소설이다. 시종일관 쓸쓸하고 어둑어둑한 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나’는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이 교제라 표현’한 관계를 맺었던 남자 슈타인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집을 샀다는 소식과 함께, 10분 뒤에 데리러 갈 테니 함께 그 집에 가자는 것이 2년 만에 걸려 온 전화의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5분 만에 찾아온 슈타인은 다소 흥분에 차 있다. 한때 ‘나’와 슈타인이 찾아다니며 발견한 그 집은, 그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였다. ‘나’는 슈타인이 모는 택시에 탄 것을 인연으로 그와 얼마 동안 함께 지내는 생활을 했다. 집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잠을 자고 잠잘 곳이 없으면 택시에서 밤을 보내는 슈타인은 세간의 표현에 따르면 노숙인과 다를 바가 없지만, 겉보기에 그는 세련된 도시인과 다를 바가 없다. ‘도시인’답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속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를 향해 보내는 시선에 실린 것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문다. 이름 모를 파티를 하고, 음악을 듣고, 마약에 취해 일몰을 바라보고,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뿐. ‘홀로 존재하고 있었고 텅 비어 있던’ 도시처럼 그들도 ‘머리는 완전히 텅 비고, 몸에는 구멍이 난 채로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으로 나날들을 보낸다. 그들이 그 시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상했던 쾌감, 덤덤함, 낯설음”이 전부다.

세계적인 의식 연구가 데이비드 호킨스는 ‘의식 지도 해설’이라는 책에서 의식을 에너지 수준으로 구분한다. 호킨스 박사는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가진 수천 명의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근육 테스트 절차를 수행해 긍정적인 의식 및 부정적인 의식과 에너지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다양한 의식은 에너지 20 수준의 ‘수치심’부터 에너지 200 수준의 ‘용기’, 에너지 400 수준의 ‘이성’, 에너지 500 수준의 ‘사랑’을 넘어 에너지 700~1000 수준의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이때 실제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임계점에 있는 의식이 ‘용기’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실제로 힘을 발생시키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아래 단계의 의식들은 힘을 앗아가는데, 수치심, 죄책감 등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의식 바로 다음으로 우리 힘을 앗아가는 것이 ‘무감정’이다. 무감정은 슬픔, 두려움보다도 더 위험한 의식이다.

무감정이란 무력한 상태를 의미한다. 세상과 미래가 다 우울하고 암울하므로 그의 인생은 ‘비애’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모든 면에서 궁핍한 무감정의 희생자들에게는 자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있어도 그것을 활용하는 데 쓸 에너지가 부족하게 여겨진다. 무감정은 희망을 포기한 수준이며, 따라서 무감정은 가난, 절망, 희망 없음을 특징으로 한다. 집을 샀다는 슈타인의 소식과 어딘가 들뜬 그의 모습이 무감정했던 그들의 시절에 비추어 이상하고 낯선 일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슈타인이 구입한 집은 예뻤다. 그러나 그 집은 폐가였고 18세기에 지어진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희망에 부풀어 집을 수리하는 데 열정적인 슈타인 앞에서 ‘미래 지향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죄지은 기분’을 느낀 ‘나’는 한마디 한다. “여름이 되면 저기 베란다에 있는 담쟁이덩굴을 없애 버릴 거”라고. 이후 슈타인은 집을 고치는 과정 내내 ‘나’에게 엽서를 보내온다. 엽서에서 그는 자주 “네가 온다면……”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할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무는 그들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건 그토록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이후 ‘나’는 슈타인의 소식을 신문 기사로 접한다.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저택이 전소했으며, 반년 전에 그 집을 구입해 수리한 주인은 실종 상태라는 내용이었다. 집은 시종 입을 다물고 살았던 그들이 유일하게 ‘말’할 수 있었던 미래였다. 그러나 그 미래는 모두 불타 버렸고,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 슈타인이 보낸 엽서와 그에게 받은 집의 열쇠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미래의 부재를, 약속의 부서짐을 숨기고 있는 한마디, ‘나중에……’.

Plus Point
유디트 헤르만(Judith Hermann)

사진 위키피디아

1970년 독일 서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자유대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98년 발표한 데뷔작 ‘여름 별장, 그 후’는 단절된 인물들의 모습과 어긋난 양상의 사랑을 포착해 낸 작품집으로, 25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며 17개 언어로 번역됐다. 이 책으로 ‘독일 문학이 고대했던 문학적 신동’이라는 찬사와 함께 1999년 휴고 발 상과 브레머 문학상, 2001년에 클라이스트 문학상을 받았다. 젊은 세대가 처한 파편화된 세계와 그들의 복잡한 내면을 잘 그려 냈다는 평을 받는 유디트 헤르만은 2009년 발표한 ‘알리스’로 프리드리히 횔덜린 상을 받았다. ‘알리스’는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며 느끼는 아픔과 고독을 담담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한다. 현재 베를린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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