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찬란한 피와 땀'을 누가 빼앗아 전시하는가[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올해들어 부쩍 ‘파르테논 마블스’(혹은 엘긴 마블스) 관련해서 심상치않는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영국 정부가 ‘파르테논 마블스’의 반환을 위한 ‘건설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힌 것이 해외토픽란에 실렸다. 또 며칠 전에는 바티칸 교황청이 바티칸 박물관이 소장했던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 3점의 그리스 반환을 공식화했다.
파파미크룰리스 그리스 정교회 신부의 “다른 나라도 교황청이 보인 모범을 따르기를 바란다”는 한마디가 함축적이다. 그 다른 나라는 영국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영국도 교황청처럼 220여년전 약탈해간 ‘파르테논 마블스’를 빨리 내놓으라”고 압박한 것이다. ‘파르테논 마블스’는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한 대리석 작품’을 가리킨다.
■‘반달리즘’ 보다 ‘엘기니즘’
‘반달리즘’이라는 용어가 있다. 5세기 로마를 침공한 반달족(Vandals·고대 게르만족의 일파)의 약탈·파괴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반달리즘’을 능가할만한, 아니 더 비열한 용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엘기니즘(Elginism)’이다. ‘엘기니즘’은 ‘다른 나라, 특히 약소국의 문화유산을 강대국이 약탈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왜 ‘엘기니즘’일까.
서양 문명의 원형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단연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다. 오죽하면 유네스코(UNESCO)의 로고가 ‘파르테논 신전’이며, 유네스코가 선정한 첫번째 세계유산 역시 ‘파르테논 신전’이 아닌가.
이 신전은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파괴된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면서 가장 먼저 조성한 건축물이다. 아테네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기원전 447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15년만인 기원전 432년 완공되었다.
신전의 조성에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 조각가인 피디아스 등이 총출동했다. 여기에 역사가 헤로도토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극작가 소포클레스 등이 자문했다. 당대의 최고지성이 모여 창조해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피디아스는 동료·제자와 함께 6년에 걸쳐 신전 장식을 조각했다. 아테나의 탄생과정을 조각한 동쪽 박공(人자형으로 붙인 건축 부재),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아테네 도시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모습을 조각한 서쪽 박공, 아테나 여신을 경배하는 행렬을 표현한 프리즈(띠모양의 부재) 등이다. 신전 외부의 92개 메토프(사각형 패널)에는 ‘라피테스와 켄타우로스의 싸움’ 등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내용을 조각했다.
그러나 자그만치 2100년 이상 끄덕없이 버티던 파르테논 신전은 수난의 역사를 겪게 된다. 17세기 그리스를 지배한 오스만 제국의 정복군은 파르테논 신전을 화약고로 활용한게 화근이 됐다. 1687년 9월26일 베네치아 포병대가 필로파푸스 언덕에서 포문을 열었다. 이 포격으로 신전 내에 설치한 화약고가 대규모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이 때의 포격으로 300여명이 사망하고, 광범위한 지역에 대리석 조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일장춘몽으로 끝난 욕망
그후 150년이 지난 1798년, 남은 잔해까지 눈독을 들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가 영국의 오스만제국 주재 특명전권대사인 엘긴 백작(본명 토마스 브루스·1766~1841)이다.
엘긴은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임지로 떠났다. 파르테논 신전의 벽과 천장을 장식한 조각품 및 조형물의 본과 주형을 떠서 자신의 개인 박물관을 장식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르테논 신전 현장에서 마음을 바꿨다. 아예 조각·부조 전체를 통째로 뜯어 영국으로 공수한다는 계획으로 수정한다.
엘긴은 급기야 1801년부터 파르테논은 물론이고 아크로폴리스 안에 있는 에레크테이온(아크로폴리스 구릉 위 신전), 프로필라이아(아크로폴리스의 관문), 아테나 니케신전 등을 장식한 조각품·조형물까지 닥치는대로 뜯어간다..
1812년까지 그가 뜯어간 작품은 남아있던 신전 조각의 반 가량인 253점에 달했고, 반출비용만 7만4242파운드(2019년 가치로 470만 파운드)에 이르렀다. 요즘 470만 파운드라면 한화로 73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그러나 거액의 이혼소송에 휘말리면서 자금난이 심해지자 결국 ‘파르테논 마블스’를 영국 정부에 팔기로 한다. 영국 의회는 1816년 청문회를 열어 갑론을박 끝에 ‘파르테논 마블스’의 구입을 결정한다. 구입 금액은 엘긴이 지불한 반출비용의 절반도 안되는 3만5000파운드였다. “개인박물관을 장식하고 싶다”던 엘긴의 욕망은 일장춘몽으로 끝난다. ‘파르테논 마블스’는 이때부터 ‘엘긴 마블스’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여배우 메르쿠리의 분투
1829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는 1835년 영국박물관 측에 파르테논 마블스의 반환을 공식요구한다.
이후 150년 남짓 반환운동의 불씨를 이어간다. 반환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은 멜리나 메르쿠리(1923~1994)였다. 메르쿠리는 1960년 출연한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배우였다.
그런 메르쿠리가 1962년 영국박물관에서 영화 ‘페드라’를 촬영할 때 파르테논 마블스를 보고 큰 충격에 빠진다. 이때 “이 문화재는 영국 것이 아니라 그리스 것이다. 이 걸작품은 반드시 그리스로 돌아와야 한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후 유력정치인으로 변신한 메르쿠리는 두 번(1981·1993년)에 걸쳐 문화부장관을 지낸다. 이때 ‘파르테논 마블스’의 반환을 위한 범국민운동의 선봉에 섰을 뿐 아니라 이를 국제사회가 풀어가야 할 문제로 승화시킨다.
메르쿠리는 1982년 멕시코 유네스코 총회에서 “영국은 약탈한 아크로폴리스 조각품들을 돌려주어 원형을 복구하도록 해야 한다”고 연설하면서 ‘모든 문화재는 원래 소유국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했다.
메르쿠리의 노력으로 1984년 ‘파르테논 마블스 반환’ 건은 유네스코와 함께 해결해야 할 ‘현안 아이템’으로 포함시켰다. 또 이듬해인 1885년엔 영국 노동당수인 닐 고든 키녹으로부터 반환약속을 받아냈다. 그런 메르쿠리가 1994년 사망하자 그리스 전국에서 조기가 걸렸다. 야당 당수조차 “메르쿠리는 헬레니즘을 현대에 구현한 영원한 그리스인”이라고 애도했다.
■쇠수세미로 그리스 조각품을 ‘빡빡’
메르쿠리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반환노력에 영국 정부는 ‘콧방귀’로 일관했다. ‘마블스’가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영국에 유입되어 국회의 동의를 거쳐 영국박물관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영국 박물관의 첨단 시설과 과학적인 관리를 통해 연구·전시되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1년에 600만명 이상의 국내외 관람객로부터 사랑받는 인류의 보편적인 유산이 되었다는 논리도 폈다.
그러나 이런 문화 우월 의식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폭로됐다. 1998년 7월 역사가인 윌리엄 세인트 클레어(1937~2021)가 저서 <엘긴 경과 대리석>에서 영국박물관이 파르테논 마블스를 손상시킨 뒤 이를 숨겨왔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1937~38년 마블스 전시실 비용을 부담한 조셉 듀빈(1869~1939)이 쇠끌과 쇠수세미 같은 도구로 세척했다는 것이다.
‘마블스’는 본래 황갈색을 띠는 아테네 인근 펜텔리쿠스산(해발 1109m)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세월이 흘러 고색창연한 색이 가미되었다. 무지한 듀빈이 “하얗게 만든다”며 손을 댄 것이다. 마블스는 이 때문에 2.5㎜나 깎이고 말았다.
박물관측은 설상가상으로 손상 사실을 쉬쉬 했고.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작품 표면에 갈색 왁스를 칠했다.
영국박물관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또 하나 근본적인 문제점은 영국 반입의 적법성 여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엘긴은 1816년 의회 청문회에서 당시 그리스를 지배한 오스만제국의 술탄(군주)의 칙령 문서(허가증)에 따른 합법적인 반출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긴이 청문회 때 제출한 허가증은 원본이 아니라 영어로 된 번역본이었다. 진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이것을 보고 울지않는 자는…
그러나 영국 정부의 입장이 요지부동인 반면 영국내 여론은 ‘그리스 반환’ 쪽으로 돌아섰다.
비근한 예로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가 실시한 2021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9%가 그리스 반환을, 18%가 ‘영국소장’을 각각 택했다. 유력신문인 ‘가디언’은 2020년 2월23일 마블스의 그리스 반환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마블스의 ‘영국박물관 소장’을 오랫동안 지지해왔던 ‘더 타임즈’도 입장을 바꿔 ‘그리스 반환’을 촉구하는 사설(2022년 1월22일)을 실었다.
‘파르테논 마블스’와 관련하여 존 고든 바이런(1788~1824)의 시 한 편이 유명하다.
바이런은 폐허가 된 파르테논 신전을 방문하고 자못 비감한 시를 남겼다.
“이것을 보고 울지 않는 자, 어리석어라. 너의 벽은 마멸되고, 허물어진 신전은 빼앗겼다. 이 유적을 보호해야 할 영국인들 손에. 다시는 회복될 수 없으리라…너의 쓰러진 신들은 북쪽의 증오스런 나라로 끌려갔도다.”(‘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흔들리는 영국
그럼에도 요지부동이던 영국 정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이 요 몇년 사이 생겼다.
그리스가 2020년 영국의 EU 탈퇴를 계기로 시작된 영국-EU 간 미래관계 협상에서 문화재 환수 문제를 의제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협상문 초안에 들어있는 ‘불법 반입된 문화재를 원소유국에 반환하거나 손실을 배상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콕 찝어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리스 주도로 포함된 이 문구는 ‘파르테논 마블스’를 겨냥한 것이다.
환수문제를 국제 이슈로 끌고 가려는 그리스의 끈질긴 노력과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최근 잇달아 보도되는 ‘파르테논 마블스’ 관련 기사는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국 정부가 ‘반환 절대 불가’라는 그간의 완고한 입장에서 벗어나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이 ‘그리스 완전 반환’을 결정할지는 미지수다. 영국은 아마도 교류 차원의 ‘장기 대여’ 방식이 유력할 것 같다.
‘파르테논 마블스’를 그리스에 장기대여하는 대신 그리스에서 다른 고대유물을 빌려오는 그런 식이다.
장기대여방식은 문화재 반환에서 종종 활용되는 절충안이다.
예컨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 297책이 2011년 장기대여형식(5년 단위)으로 반환되었다.
1982년 멕시코 변호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훔쳐온 15세기 ‘아즈텍 달력’(오뱅 토날라마틀)도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
프랑스는 사건초기 “도난품을 빨리 돌려달라”고 기세가 등등했지만, “원소유국인 멕시코에 놔둬어야 한다”는 멕시코 국내 여론 때문에 입장을 바꿨다. 프랑스는 10년에 걸친 협상 끝에 장기대여형식으로 ‘아즈텍 달력’을 돌려주었다.
‘파르테논 마블스’의 경우도 그러한 장기대여형식의 반환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외교 수단이 된 문화재 반환
최근의 국제 조류 또한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약탈 문화재가 원소유국으로 반환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강임산의 ‘최근 국제사회의 문화재 환수 이슈가 던진 시사점’, <국외소재문화재 이슈페이퍼>1,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20)
2017년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 중 ‘식민지시기 약탈문화재 환수’문제를 공식화했다.
프랑스는 그 말을 뒷받침하듯 19세기말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간 아보메 왕궁 동상 등 26점을 서아프리카 베냉 정부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식민지 시절 노획한 ‘세네갈 독립운동가(오마르 사두 툴)의 칼’도 반환했다.
또 이탈리아와 중국은 이탈리아 소재 중국문화재 796점을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독일역사박물관도 19세기말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약탈한 유물(스톤크로스)의 반환을 결정했다. 독일은 또 아프리카의 옛 베냉 왕국 유물 20점을 나이지리아 정부에 반환했다.
미국은 2300년 전 사제의 관인 ‘황금관’과 ‘녹색관’을 이집트에 돌려줬다. 2019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19세기 말 아프리카 배냉(현 나이지리아) 에서 약탈한 ‘청동수탉’을 나이지리아에 반환했다.
지금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던 열강이 최근들어 문화재 환수와 관련해서 다소간 물꼬를 튼 이유가 무엇일까.
문화유산 환수 이슈를 외교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리스가 브렉시트(2020년 1월)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치열한 외교전을 펼친 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단적인 예이다.
그리스는 2019년부터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노선에 동참해 차이나머니를 적극 유치했다. 이와함께 그리스와 중국은 ‘동·서양 문명의 원류국가’인 두 나라이니만큼 “외세가 약탈한 문화재를 같이 찾아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중국의 지지를 이끌었다.
또한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약탈해간 문화재의 반환에 앞장서는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인 전략이 담겨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2014년 이란과 핵협상 타결 직후 2003년 미국으로 밀반입됐다가 뉴욕 세관에 압수된 2700년 전 고대 페르시아 왕조의 유물을 이란에 전달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냉소적인 시각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수만~수십만점에 달하는 약탈 문화재 가운데 극히 일부를 내주면서 갖은 생색을 내는 열강의 행태를 좋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절대 그렇지는 않다.
■품위있는 피약탈국의 자세로
다만 최근들어 약탈문화재에 관한 국제사회의 인식과 여론이 피탈국, 즉 약탈을 당한 나라의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1995년 발효된 ‘유니드로와(UNIDROIT)협약’은 “도난 및 약탈문화재는 그 문화재의 기원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피탈국, 즉 약탈당한 문화유산이 많은 대한민국의 경우 어떤 스탠스를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스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문화재 환수 이슈는 이른바 피탈국의 도덕성과 대의명분이 외교적인 실리와 맞물려 활용되는 추세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환수 노력를 펼치고, 외교채널을 통해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호소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함으로써 기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품위와 격조를 지키는 피약탈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진정성 있게 다가가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최근 소유권 소송 중인 고려 불상의 경우 자칫 ‘일본=피탈국, 한국=약탈국’의 프레임이 씌워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도 하다. 과거 일본의 문화재 약탈행위가 분통 터지고, 현재 반성없는 태도가 괘씸하지만 자칫 소탐대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문화유산 환수의 알파요 오메가는 정권이 바뀌어도 일관되어야 할 정부의 철학이다. 그리스의 메르쿠니처럼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인물이 없을까. 새삼 메르쿠리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죽기 전에 아테네에서 마블스(대리석)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 돌아온다면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참고자료>
강임산, ‘최근 국제사회의 문화재 환수 이슈가 던진 시사점’, <국외소재문화재 이슈페이퍼>1,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20
김경민, <뜻밖의 세계사>, 네이버지식백과, 2013
김경임, <약탈문화재의 세계사 1>, 홍익출판사, 2017
이보아,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 민연, 2002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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