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문학 대표한 ‘참여 지식인’ 떠나다

채민기 기자 2023. 3. 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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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오에 겐자부로 별세
日 전쟁 범죄·부조리 비판한 작가
일왕 훈장은 거부 “권위 인정 못 해”
한·일 병합 조약 무효 선언도 참여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2015년 3월 방한해 소설 ‘익사’ 한국 출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뉴시스

일본 작가로는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88)가 지난 3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들은 오에가 노환으로 별세했으며 가족들이 참석해 장례를 치렀다고 13일 보도했다. 오에는 전후 일본 문단의 기수(旗手)이자 일본 내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상징하는 실천적 작가로 손꼽힌다.

1935년 에히메현에서 태어나 도쿄대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했다. 도쿄대 재학 시절인 1957년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전투기에서 추락한 미군 흑인 병사가 산골 사람들 손에 짐승처럼 길러지는 과정을 소년의 눈으로 그린 ‘사육’으로 제39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당시 23세로 최연소 수상이었다. 청년 시절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에 심취했으나, 장남이 지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일을 계기로 인간의 비애와 치유, 구원을 그리는 문학으로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수상)에 이어 일본 작가로 두 번째, 인도 시인 타고르(1913년 수상)까지 치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나온 노벨 문학상이었다. 당시 스웨덴 한림원은 1962년작 소설 ‘절규’를 언급하며 “생활과 신화를 응축시킨 상상의 세계를 무대로 오늘날 인간의 당혹스러운 곤경을 시적으로 표현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노벨상을 받은 뒤 일본에서 문화훈장 수여 대상자로 선정됐지만, 일왕이 수여하는 이 훈장을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외국의 상은 받으면서 일본의 훈장을 거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우익 단체 등으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우경화를 비판하고 평화를 강조해온 참여적 작가로서 양국 과거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0년, 병합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한 양국 지식인 1000여 명 공동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의 전쟁 범죄를 비판하면서도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2017년에는 국내외 학자·예술인 90여 명과 함께 박 교수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올바른 인식’과 ‘허위 인식’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연구와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만든다. 앞으로 신변의 위해를 입지 않으려면 국내외 주류 집단에서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역사 인식만을 따라야 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인간의 심연에 내재된 불안을 환상적 필체로 형상화하면서 전후 일본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한 작품이 많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엔원년의 풋볼’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체험’ ‘치료탑’ ‘익사’ 등의 작품이 있다. 원폭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히로시마 피폭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 ‘히로시마 노트’를 남겼다. 2015년에는 평화 문제에 전념하겠다며 소설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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