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온돌 문화의 전파자 자선당

2023. 3. 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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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오쿠라, 자선당 뜯어 자택 옮겨
호텔 건립 위해 초청한 美 건축가
온돌 체험하며 바닥 난방에 도입
韓 난방문화 전파 계기 ‘아이러니’

2018년 겨울, 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현 국립문화재연구원) 자격으로 일본 국립규슈박물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총회에 참석했다. 당시 ICOM 총회의 주제가 ‘문화재와 자연재해’였기에 나는 기조 발표자로 초대받았다. 2016년 경주, 2017년 포항에서 연이어 지진이 발생해 문화재에 피해가 있었고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한 경험 때문이다.

마침 박물관에서 오쿠라 컬렉션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는 메이지(明治·1868∼1912) 초기부터 조선과 대만에 진출해 무역과 토목업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였다. 오쿠라는 부산항 매립(1902∼1908), 조선의 철도(1902∼1904), 덕수궁 석조전(1903∼1904) 등 일제의 한반도 진출을 위한 공사를 도맡았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기획전 설명에 따르면, 오쿠라는 일본에서 불교를 탄압하면서 불상의 목이 잘리는 등 옛 유물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사 모으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권 유물을 나름의 안목으로 수집했다. 이렇게 모은 유물을 수장하고 전시하기 위해 그는 1917년 일본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을 설립했다.

나에게 그가 특별한 것은 그의 컬렉션 중에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쿠라는 조선 총독을 움직여 경복궁의 세자궁이었던 자선당을 뜯어갔을 것이다. 그는 당시 막대한 재력에다 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 신분이었으니 멸망한 조선의 세자궁을 탐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다. 1914년, 오쿠라는 이렇게 뜯어간 자선당을 자기 집에 옮겨 지었다.

세상은 참 묘한 구석이 있다. 일본으로 뜯겨간 자선당이 우리 문화의 전파자 역할을 할 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온수관을 바닥에 깐 현대식 온돌이 탄생하는 계기가 자선당에서 비롯되었으니.

1914년, 일본 도쿄의 데이코쿠(帝國) 호텔 소유주였던 오쿠라는 호텔 신관을 짓기 위해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라이트 자서전에 따르면, 라이트는 그해 겨울 건축주인 오쿠라 집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는데 너무 추워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당시 일본의 난방 장치는 ‘히바치’였는데, 화로에 숯을 담아 방바닥에 두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히바치 주변에 둘러앉아 추위를 쫓았다.

라이트 일행은 식사 후 차를 마시기 위해 어떤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 봄이 된 듯 따뜻하고 쾌적해졌다. 라이트는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난방시설은 방 어디에도 없었다. 이때 라이트에게 일본인 통역자가 한국의 온돌에 관해 설명했다. 라이트가 들어갔던 방은 바로 자선당이었다.

바닥난방의 쾌적함에 감명받은 라이트는 곧바로 데이코쿠 호텔 욕실 바닥에 전기코일을 깔았다. 욕실은 맨발로 사용하는 공간이라 바닥이 따뜻하면 기분 좋을 것이라고 라이트는 생각했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간 라이트는 자기에게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들을 설득해 바닥난방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때는 요즘처럼 보일러와 온수 배관을 사용했다. 미국 건축가가 우리 온돌에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이에 비해, 1920년대 일본의 건축 전문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실린 건축전문가들의 온돌에 대한 평가는 부정 일색이었다. 이들은 온돌은 비위생적이며 기거하는 사람의 행동을 둔화시켜 게으르게 한다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현재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근대 건축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 건축이 비로소 유럽 건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게 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펜실베이니아주 밀런의 낙수장(1935)과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1956) 등이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라이트의 작품이다.

라이트가 온돌을 체험했던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고 말았다. 이때 도쿄 대부분의 건축물이 무너지거나 불탔는데도 데이코쿠 호텔 신관은 멀쩡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건축물에 신축줄눈(Expansion Joint)을 도입해 유연성을 갖게 한 라이트의 내진설계 덕분이었다. 라이트는 건축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적절해야 한다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론을 주창했는데, 데이코쿠 호텔 신관은 지진이 빈발한 일본에 적절한 건축이었다.

라이트의 데이코쿠 호텔은 1967년 경제적인 이유로 증축을 위해 철거되었지만, 현관과 로비 일부는 박물관 메이지무라(明治村)로 옮겨져 현재도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2004년, 나는 일본의 근대문화재 보존정책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메이지무라’에서 호텔의 현관과 로비를 보고 받았던 감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아마 당시의 감동이 유별났던 것은 내가 읽은 라이트의 자서전 속 ‘코리안룸(Korean room)’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 입장에서 오쿠라가 경복궁에서 자선당을 뜯어 간 것은 분개할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 온돌 문화가 전파되고 발전되었으니 참 묘한 일이다. 문화의 전달은 옳고 그름도 민족적 감정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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