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정책실장’ 신설한 이유는 알겠지만 왜 나였을까?”

한겨레 2023. 3. 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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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6화-초대 정책실장 임명

2003년 2월19일

당선자 집무실로 갔다.

대선 기간 딱 세번 만났는데

뜻밖에 ‘정책실장’ 제안을 했다.

나는 극구 고사했다.

이 자리는 새 정권의 방향타와 같은

상징성이 있었다.

그 배경을 알려면

‘대통령의 성공조건’을 읽어야 한다.

2월23일 라디오를 켜니 ‘임명’ 뉴스가 나왔다.

강력 고사도 소용없구나.

그 길로 차를 돌렸다.

중책을 어찌 감당하나

걱정이 앞섰다.

2003년 2월23일 노무현(왼쪽) 대통령은 신설한 정책실장 자리에 이정우(오른쪽) 교수를 임명했다. 두 사람이 취임 초기 청와대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노무현 대통령은 평소 사람 이름을 통 못 외운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름을 외울 정도면 꽤 가까운 사이라고들 했다. 인수위가 시작하고 한 달 뒤쯤 외교부청사 별관에 있던 사무실의 복도에서 우연히 노 당선자를 마주친 적이 있는데 1, 2초 생각하더니 ‘이 정 우 교수’라고 겨우 내 이름을 기억했다.

인수위 활동이 끝나가던 2003년 2월19일(수) 오후 3시쯤 당선자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당선자가 나를 보자고 한다고. 인수위 안에 있는 당선자 집무실로 갔다. 방이 아주 작았다. 독대는 처음이다. 당선자는 모피아(Mofia: 재경부와 마피아의 합성어, 재경부 관료들을 마피아에 비유하는 비난조 용어)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보여주며 참고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재경부 장관과 인수위원들 몇몇에 대한 인물평이 화제에 올랐다. 당선자는 잘 아는 인수위원들에 대해 간단한 인사자료를 만들어 제출해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당선자가 불쑥 “정책실장을 맡아주지 않겠습니까?”라고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능력 부족, 건강 문제 등 이유로 그런 중책을 맡을 사람이 못된다고 극구 고사했다. “그럼 정책실장으로 누가 적임이겠습니까?”하고 묻기에 강철규 교수(참여정부 초대 공정거래위원장)를 강력 추천했다. 조금 뒤 “경제부총리로는 누가 좋겠습니까?”하고 묻기에 이번에도 강철규 교수를 추천했다, 그러자 당선자가 “그 분은 아까 추천하지 않았습니까?”한다. 나는 대답했다. “아, 그 분은 뭘 맡아도 잘 할 분이라서요”

2002년 8월10일 노무현 후보 캠프에 합류한 이정우 교수는 대선 기간 노 후보를 딱 세번 만났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산은캐피탈 건물에서 처음 만난 때로, 오른쪽부터 노 후보·김병준 ·정세균·서동만·이정우 등이다. 노무현사료관

그밖에 훌륭한 인물로 경북대 동료 김민남·김윤상 교수를 추천했더니 당선자는 좋은 사람들은 따로 인사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인수위 마지막 날 나는 몇 사람의 인사자료를 정찬용 인사보좌관에게 전달했다.) 그밖에 박정희기념관 문제, 박찬석 경북대 총장이 주장하는 인재지역할당제에 대해 잠시 토론했고, 인수위원 몇몇 사람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 30분간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다가 밖에 김병준 정무분과 간사가 대기 중이라서 서둘러 방을 나왔다.

나는 이로써 정책실장 이야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초대 대통령 정책실장에 누가 임명되느냐는 그때 언론의 주요 관심사였다. 매일같이 정책실장 하마평이 신문에 오르내렸다. 이 자리는 새 정권의 방향타와 같은 상징성이 있어 관료가 오면 안정을, 개혁파 학자가 오면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언론에서는 해석했다. 대통령 정책실장은 노 당선자가 신설한 자리다. 그 전까지 청와대에서 실장 자리는 비서실장과 경호실장뿐이었다. 정책실장 자리가 신설된 배경을 알려면 박세일(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서울대)·김병국(동아시아연구원장·고려대) 교수 등의 공저 <대통령의 성공조건>(I·II, 동아시아연구원, 2002)을 읽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당선 직후 청와대 직제·기능 개편 구상에 참고한 책 <대통령의 성공조건>의 표지. 이른바 ‘박세일 보고서’로 알려지기도 했다. 동아시아연구원 제공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주장을 한다. ‘대통령은 권력기관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하며, 대통령의 정보기관장 독대를 없애야 한다. 청와대는 정책(일) 중심으로 가야 하고, 정책의 기획·조정·모니터링 기능이 중요하다. 대통령은 행사 참석보다 정책에 주력하고, 소수의 대통령 프로젝트에 집중한다. 대통령 프로젝트에 집중하기 위해 청와대에 정책실을 신설한다, 그리고 인사수석실을 신설한다. 최고정책조정회의를 설치하고 정책실장이 참석한다. 국책연구소를 재편하여 국회 산하기관으로 만들어 국회의 정책 역량을 높인다. 대통령은 소수의 대통령 프로젝트와 외교안보에만 전념하고 나머지 국정은 총리에게 위임한다. 총리 산하 국무조정실의 기능을 대폭 강화한다. 총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총리의 장관 제청권을 강화하고, 각 부처 장관이 먼저 총리에게 보고하고 난 뒤에 대통령에 보고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이 이 책의 뼈대였다. 대통령에 대한 통념을 깨뜨린 참신하고 획기적 내용을 담고 있다. 노 대통령은 2002년 12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읽은 모양이다. 대선 막바지이던 때인데, 그 바쁜 일정 속에서 어떻게 두터운 두 권짜리 책을 읽었는지 놀랍다. 노 대통령의 독서열은 알아줘야 한다. 청와대 시절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갈 때 나는 한 두쪽 짜리 보고서와 더불어 읽고 있던 책을 들고 들어갈 때가 많았다. 보고가 끝나면 대통령은 그게 어떤 책인지 반드시 질문을 하고는 “나는 요새 바빠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라며 한탄하곤 했다.

‘독서광’으로 꼽히는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책 읽을 시간을 아쉬워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인 2002년 8·8보궐선거 유세 지원 와중에 <공무원이 설쳐야 나라가 산다>를 읽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왼쪽)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오른쪽) 여사와 함께 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인 2002년 8월 서울 명륜동 자택의 서재를 기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선 시기인 2002년 8월 노 후보가 살던 명륜동의 빌라에 기자들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 집의 거실 책장에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어느 기자가 호기심이 발동해 노 후보에게 물었다. “이 많은 책 중에 몇 권쯤 읽었습니까?” 노 후보가 대답하기를 “거의 다 읽었습니다”. 참석한 기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독서를 많이 한 대통령은 내가 알기로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다. 역사상 성군으로 불리는 당 태종, 청 강희제, 조선의 세종, 정조의 공통점도 독서다. 이들 네 명의 왕은 신하들을 능가할 정도로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고 당대 최고 석학이었던 신하들과 대등하게 토론할 실력이 있었다. 물론 독서를 많이 한다고 반드시 성군이 되는 건 아니지만 독서 안 하고 성군되기는 글렀다.

나는 한참 훗날 <대통령의 성공조건>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실행에 옮긴 청와대 직제·기능 개편이 이 책에 크게 의존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이 책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책임총리제는 찬성하지 않는다. 한국의 총리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욕심 때문에 생긴 기형적 제도인데, 대통령제 하에서 총리라는 자리 자체가 특이하고 예외적이다. 그 결과 청와대와 총리실이 많은 고급인력을 이중으로 쓰면서 중복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옥상옥이다. 차라리 총리를 폐지하고 부통령을 러닝 메이트로 뽑아 청와대 안에서 일하게 하면 예산과 인력을 크게 절감하면서 업무의 효율성도 높아질 것이다. 그게 진짜 대통령제가 아닌가.

2003년 2월25일 취임식 직후 청와대에 입성한 노무현(왼쪽) 대통령은 이정우(오른쪽) 정책실장을 비롯 수석보좌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며 집무를 시작했다. 노무현사료관

그런 그렇고 다시 정책실장 이야기로 돌아오자. 나는 정책실장 제의를 극구 고사하고는 나흘 뒤, 2월23일(일) 인수위 업무가 끝나 프레지던트호텔에 있던 짐을 차에 싣고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폰이 울려 받으니 인수위 동료였던 윤후덕 전문위원(현 파주 국회위원)이었다. 내가 정책실장에 임명될 것 같으니 뉴스를 들어보라고 한다. 차의 라디오를 켜니 정말 그런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강력 고사도 소용없구나. ‘인수위 두 달만 봉사한 뒤 학교에 복귀한다’는 임채정 인수위원장의 약속도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정부에 들어가 일한다는 생각은 정말 조금도 없었다. 두달 전 인수위원 임명 때도 그랬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관두고 싶어도 관둘 수가 없다. 그 길로 차를 돌렸다. 중책을 어찌 감당하나 걱정이 앞섰다.

세월이 흐른 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인수위 때 노 당선자가 불러 만났더니 경제부총리를 제의하더라. 그런데 앞서 총장 선거과정에서 이런 약속을 했다. “역대 서울대 총장이 임기를 채운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나는 최초로 임기를 채우는 총장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총장 임기를 채워야 한다고 말했다. 당선자가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는 적임자를 추천해달라고 해서 두 사람을 추천했다. 김종인과 이정우. 그랬더니 당선자가 말하기를 “이정우 교수는 작년 대선에서 내 지지율이 바닥일 때 와서 도와준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정책실장이 된 까닭은 정 총장의 추천 덕분이 아닐까. 그리고 인수위 끝날 무렵 경제1분과의 정태인 위원이 출입기자들에게 ‘정책실장은 무조건 이정우라야 한다’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마구 떠들고 다닌 것도 작용했을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대선 기간 딱 세 번 만난 사람에게 중책을 맡긴 까닭이 내내 궁금했다. 언젠가 노 대통령에게 직접 여쭤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대사에 바쁜 대통령에게 개인적 질문을 하는 것은 실례라서 감히 여쭙지 않았다. 퇴임한 뒤 봉하에 가서 여쭤보려 했는데 그만 영구미제가 되고 말았다.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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