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측, 과거 미쓰비시 협상안 공개 “정부안보다 월등” [전문]

김예진 2023. 3. 1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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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 측이 2011년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과 진행했던 협상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협상은 민간 신분의 피해자 측이 미쓰비시와 협상으로 이끌어냈던 합의안이다. 미쓰비시가 동원의 강제성 및 불법성을 인정하고 유감 표명도 담겨있어, 현 정부가 발표한 해법보다도 훨씬 진전된 내용이었음이 확인됐다.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일본의 강제동원 사죄와 전범기업의 직접배상 이행을 촉구하는 국회의원모임’, ‘한·일 역사정의 평화행동’이 주최하는 강제동원 정부해법 검증 긴급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서는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이 2011년 12월 26일자 미쓰비시 중공업이 작성한 ‘합의문 수정안’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 합의안은 피해자 측의 요구가 다 수용되지 않아 피해자 거부로 최종 합의에 이르지는 못해 사장된 안이나, 미쓰비시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증거’가 된다.
미쓰비시 중공업이 2011년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협상 과정에서 피해자들에게 제안했던 합의문.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이 13일 국회 토론회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임재성 변호사 페이스북
당시 미쓰비시가 피해자측에 제안한 합의문 2항에는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문구가 적시돼 있다. 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미쓰비시가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판결문에 기재된 내용 중 ‘강제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들을 인정, “확인한다”는 문구가 1항에 포함됐다. 가령 “‘···가지 않으면 너의 아버지를 경찰이 잡아 가둘 것‘(항소인 양금덕) 등 협박당했던 점을 종합하면, 각 권유자들이 본건 근로정신대원들에게 기망 또는 협박을 통해 정신대원에 지원하게 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식이다. 이처럼 강제성과 불법성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함께, “본건 공장에서의 노동과 생활에 대해 그들의 연령,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점, 빈약한 식사, 외출과 편지의 제한 및 검열, 급여 미지불 등의 사정이 인정”된다고도 돼 있다.

피해자 측은 정부가 ‘제3자 대위변제안’을 거론하자, 어떻게 과거 민간 차원에서 했던 협상보다도 훨씬 후퇴한 안을 제안할 수 있냐고 반발해왔다.

피해자 측을 대리해온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2011년 미쓰비시 제안 합의안을 공개하면서 “피해자 측이 요구했던 위자료 및 기념비 건립 등이 관철되지 않아 당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민간 차원 협상으로 이 정도의 문서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임 변호사는 “1항은 법적 책임은 없지만 불법행위를 인정한다는 내용, 2항은 불법행위에 대한 사과”라며 “일본이 말하는 1965년 청구권협정과 배치될 내용도 없어 1965년 협정 때문에 사과도 못한다는 것은 웃기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다음은 공개된 2011년 합의안 전문.
2011년 12월 26일
 
【회사측 수정안】
 
제1항
 
미쓰비시중공업과 할머니들은 할머니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일본재판소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할머니들의 청구를 기각한 판결주문을 존중한다. 또한, 판결 이유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음을 확인하다.
 
『같은 해 [1944년] 5월 말경 전라남도 목포, 나주, 순천, 여수 및 광주 각지에서 본건 근로정신대원들을 포함한 근로정신대에 참가한 소녀들이』, 『본 건 공장 [당시의 미쓰비시중공업주식회사 나고야항공기제작소 도토쿠<道德>공장] 제 4료와료<菱和寮>에 도착했다.』, 『지진으로 인해 본건 공장 건물 대부분이 붕괴되어 전라남도 출신 근로정신대원이었던 김순례<金淳禮>, 김향남<金香南>, 최정례<崔貞禮>, 서복영<徐福榮>, 이정숙<李貞淑> 및 오길애<吳吉愛(吳原愛子)>의 6명을 포함한 57명이 사망했다.』, 『작업복을 입은 채 귀국했다.』, 『본건 근로정신대원들이 정신대원에 지원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①권유를 받은 당시 연령(항소인 박해옥<朴海玉>은 13세, 동 김혜옥<金惠玉>은 13세, 동 진진정<陳辰貞>은 14세, 동 양금덕<梁錦德>은 14세, 김순례는 14세, 김복례<金福禮>는 14세, 항소인 김성주<金性珠>는 14세)이 모두 어리고 충분한 판단능력을 갖출 만한 나이가 안 되었으며, 그때까지 상기 제2의 2(2)와 같은 교육을 받은 상태였다는 점, ②이에 대해 권유자(교장, 담임교사, 헌병, 도나리구미[번역자 주: 隣組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민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최말단 지역 조직]의 애국반<愛國班> 반장)는 교장이나 담임교사 등 신뢰하고 있던 자, 나아가서는 경의를 표해야 하는 자였으며 그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을 전제로, ③권유내용(「일본에 가면 학교에 다닐 수 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 또는 단순하게 「돈을 받을 수 있다.」, 「2년간 군수공장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면 그 후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이 향학심을 가지고 상급학교 진학을 바라던 자에게는 매우 매력적이었으나 그러한 공부 기회 보장은 제도로서 예정되어 있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점, ④부모 등의 반대에 대해서는 교장으로부터 「너의 부모는 계약을 어겼으니 형무소로 보내질 것이다.」(항소인 박해옥), 「···가지 않으면 너의 아버지를 경찰이 잡아 가둘 것이다.」(항소인 양금덕), 헌병으로부터 「한번 간다고 한 사람은 꼭 가야 한다. 가지 않으면 경찰이 와서 가족과 오빠를 묶고 갈 것이다.」(항소인 진진정) 등 협박당하거나, 무단으로 인감을 가져와 서류를 갖춘 것을 알면서 묵인하거나 했던 점(항소인 이동련)을 종합하면, 각 권유자들이 본건 근로정신대원들에게 기망 또는 협박을 통해 정신대원에 지원하게 한 것으로 인정된』다.
 
『본건 공장에서의 노동과 생활에 대해서는 그들의 연령, 그 연령에 비해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점, 빈약한 식사, 외출과 편지의 제한 및 검열, 급여 미지불 등의 사정이 인정된』다.
 
제2항
 
미쓰비시중공업은 전쟁 중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여자근로정신대원들이 당시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 힘든 고생을 하신데 대해 진심으로 유감의 뜻을 표한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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