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웬만해선 시트콤을 막을 수 없다
힘들 때 우는 것은 삼류고, 참는 것은 이류지만, 웃는 사람은 일류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탤런트 이상민 씨가 지난 2013년 (무려 10년 전이네요) 한 방송에 출연해 셰익스피어의 경구라며 인용했는데, 큰 빚에 시달리면서도 쓴 미소를 짓던 이 씨의 표정 그리고 문구가 어우러지며 절묘한 '짤'이 생성되었고 이윽고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이상민 씨는 그 후로 '일류좌'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아무래도 셰익스피어가 남긴 많은 경구중에서, 환난을 극복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한 일부 글귀를 어느 의욕적인 해설가가 상당히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베니스의 상인> 중에는 비슷한 대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운명을 정복하는 사람들은 어려울 때도 웃으며,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 것이지, 자기가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웃음, 규칙을 위배할 때 싹트는 것
긴장감 속에 있다가 그 긴장감이 사라질 때 웃음이 나온다는 각성 이론, 다른 사람의 열등감을 갑자기 깨닫게 될 때 우월감과 기쁨을 느끼면서 웃음이 유발된다는 우월성 이론, 원래 심각한 의미로 인지된 것이 갑자기 기대와 다르게 어처구니없거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웃음이 유발된다는 부조화 이론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부조화 이론의 예시는 이런 겁니다.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추억의 최불암 시리즈를 소환해 봅니다.
연예인 최불암이 약사가 되었다. 어느 날 약국에 손님이 와서 쥐약을 달라고 했다. 최불암이 손님에게 물었다. "댁의 쥐는 어디가 아픈가요? 증상을 말해주세요" 마지막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담화 구조와 차이가 없지만 이른바 '급소 문장'이라 할 수 있는 담화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바로 저 문장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유머'가 된다는 겁니다.
유머와 웃음이 대화가 통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지켜지기를 기대하는 원칙을 위배했을 때 탄생한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그라이스(Grice)라는 학자는 이런 원칙을 '격률'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는데요. 먼저 협동의 원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화자와 청자는 대화의 맥락을 서로 일치시키도록 협동한다는 겁니다. 이 격률이 위배되면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집니다.
A : 나잇값 좀 하세요!
B : 나이 한 살에 얼마입니까!
그다음으로는 양과 질의 격률입니다. 양의 격률은 의미가 통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적절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질의 격률은 화자의 말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밖에도 대화 주제에서 관련 있는 내용만 말할 것을 기대한다는 '관련성 격률', 화자와 청자가 서로 간단명료하게 말할 것으로 기대하는 '방법의 격률'이 있습니다. 조금 헷갈릴 수 있으니 예시와 함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라진 시트콤 자리를 메운 '캐릭터 쇼'
서사와 캐릭터를 갖추고, 주 4일 이상 같은 시간대에 30분가량 방송되던 에피소드 단위의 극. 시트콤은 시추에이션 코미디(situation comedy)의 약칭으로, 고정된 무대와 등장인물을 배경으로 독립된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엮는 드라마와 코미디의 혼성장르를 뜻합니다. 주로 인물의 성격, 인물 간 배경, 사건 등을 토대로 한 '특수한' 상황 설정에 의해 웃음이 유발됩니다.
시트콤이 장르로서 한국에서 최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후반입니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 방영된 MBC <하이킥> 시리즈에 앞서, SBS에도 이 시절 나온 명작들이 많습니다. <순풍산부인과>, <웬만하면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똑바로 살아라> 등은 현재도 방영 당시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젊은 세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시트콤입니다.
걸출한 신인들과 여전히 회자되는 명대사를 배출한 <순풍산부인과> 시리즈는 SBS 유튜브 채널 <빽능>에서 무려 1천3백3십 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 저녁 정해진 시간에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보던 추억을 잊지 못한 '그때 그 시절'의 시청자들은 물론, 수요가 있지만 충분한 공급이 따라주지 않는 한국 코미디 시장의 새로운 고객들이 꾸준히 채널을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이렇듯 주 5회 30분씩 방영되는 '정통 지상파 시트콤'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통상 메인작가 5명과 보조 작가 5명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매일 회의를 거쳐 100편이 넘는 에피소드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됩니다. 제작 스태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회 분량이 적더라도 매일 정시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선 리소스가 적잖게 들어갑니다. 다시 말해 프로그램을 하나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다는 이야기죠.
2010년대 들어 콘텐츠 제작 환경과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연극 느낌의 소품과 비슷한 배경에서 찍는 시트콤에 대한 시청자들의 수요도 줄어들었습니다. 명맥을 이어오던 지상파 시트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춘 건 그때부터입니다. 가성비가 떨어졌거든요. 대신 '코미디' 장르에 대한 여전한 수요는 조금씩 다른 프로그램들이 적극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뉴트로' 열풍에 소환된 시트콤, '온라인 콩트'로 부활
정혜경 기자choi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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