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달라진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여여한 독서]

김이경 2023. 3. 1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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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의 여여한 독서] 〈케임브리지 세계사 콘사이스〉
메리 위스너-행크스 지음, 류형식 옮김
소와당 펴냄
ⓒ한성원 그림

독서회 친구들이 올해 역사 공부를 해보자고 한다. 좋다곤 했는데 막상 책을 고르려니 쉽지 않다. 역사란 주제가 워낙 넓고 깊어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아득하다. 일단 이제까지 듣고 배워 익숙한 서구 중심의 세계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쓴 세계사부터 읽기로 했다. 처음이니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으로.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타밈 안사리가 쓴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뿌리와이파리, 2011)가 눈에 띈다. 이슬람권을 다룬 역사서는 유진 로건의 역저 〈아랍〉이 있지만 육중한 덩치가 부담스럽고, 타밈 안사리의 책은 조금 편하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미국에서 세계사 교과서를 만드는 데 참여했던 안사리는 이슬람 세계가 누락된 역사 서술에 문제점을 느끼고 책을 썼단다. 과연 여러 면에서 기존 세계사와는 다르다. 공간적으로는 인도아대륙과 중앙아시아, 이란고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중간세계’가 주된 배경을 이루며, 시간적으로는 이슬람교가 확립되는 622년 히즈라(이슬람력 원년)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처음엔 낯선 고유명사 때문에 애를 먹었으나 익숙해지자 시각과 생각이 점차 달라진다. 수천 년간 인류사를 이끌어온 중간세계에 대해 너무 몰랐음을 깨닫는다.

내친김에 좀 더 지역을 넓혀본다. 아랍·몽골·인도·남미 등을 연구한 국내 학자들이 함께 쓴 〈더 넓은 세계사〉(삼인, 2022).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아프리카·서아시아·중앙아시아·동남아시아·인도·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드문 책이다. 예전에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한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15년 만에 나온 후속작이다. 필진으로 참여한 이슬람 연구자 이희수의 말처럼, 이 책은 확장된 지역사를 통해 ‘문명’과 ‘발전’이라는 유럽 중심적 인식론을 넘어선 “인류사의 새로운 지혜와 배움”을 보여준다.

보편도 우열도 없는 ‘최선의 역사’

서구 중심의 문명사관이 막을 내렸음은 메리 위스너-행크스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콘사이스〉를 봐도 알 수 있다. 유럽사와 젠더사 연구자인 메리 위스너-행크스는 전 세계 학자 200여 명이 참여한 ‘케임브리지 세계사 시리즈’를 총괄하며 개론서 격인 이 책을 썼다. 쉬운 듯 쉽지 않아서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봐온 세계사와는 시각도, 다루는 주제도, 서술방식도 달라서다.

흔히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출판사에 다닐 때 일이다. 나이 든 독자가 새로 펴낸 역사책이 엉망이라며 빨갛게 교정한 책을 들고 와 환불을 요구했다. 확인해보니 30년 전 역사 사전으로 교정한 것이었다. 새로운 사료와 연구가 나와서 사실이 달라졌다고 설명하자 옛날 일이 바뀔 리 있냐며 화를 내셨다. 그렇다, 옛날에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접근방식과 분석력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우리가 아는 역사와 역사 서술이 달라진다. 그래서 역사학이란 학문이 있고 역사가 다시 쓰이는 것인데, 많은 이들이 종종 이걸 잊는다.

그 점에서 이 책은 현대 역사학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주는 본보기와도 같다. 저자는 서론에서 “생산자와 재생산자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하겠다고 밝힌다. 처음엔 노동자 중심의 역사 서술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고고학·인류학·여성학·구술사·생활사 등 여러 학문적 성과를 반영한 이 책에서 ‘생산자’ 인간은 “먹이활동을 하는 포레이저, 농부, 공장 노동자일 뿐 아니라 무당, 필경사, 사무관”을 가리키며, ‘재생산’은 가족과 친족 구조, 성별, 인구 규모 등을 모두 포괄하는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저자의 말은 정치나 전쟁 같은 제도와 사건에 초점을 맞춘 (익숙한)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서 긴밀히 연결돼온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겠다는 다짐이다.

그 결과 정부와 지배 엘리트가 수행한 거대한 정치 경제적 과정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전통에 입각한” 역사 대신, 노동·가족·여성·젠더·어린이·정체성 등에 초점을 맞춘 낯선 역사가 드러난다. 주제뿐 아니라 다루는 범위도 기존 세계사 책보다 넓고 포괄적이다. 이전엔 문자 기록을 기준으로 ‘선사’와 ‘역사’ 시대를 갈랐으나 이 책은 그런 구분에 매이지 않는다. 인류의 삶은 문자를 넘어 이어져왔으니 기록된 것만 역사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지배층이 기록한 정치 경제 중심의 역사와 달리 구술을 포함한 사회 문화적 역사 쓰기를 했지만, 이 역사에도 지배와 착취, 전쟁과 약탈, 차별과 억압은 면면히 이어진다. 노예제와 여성 차별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발명된 ‘인종’과 같은 차별 기제는 과학의 이름으로 더 큰 설득력을 얻은 게 사실이니 저자는 이 어두운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어둠은 늘 그렇듯 빛을 동반한다. 고대에 노예제가 지배적인 사회는 로마뿐이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구 중심 역사관이 당연시한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제’식의 역사 발전 단계론의 허구성을 드러내며, 역사란 단일한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고대-중세-근대’의 발전론이 인류사의 보편이 아님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데,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리에서 제 환경에 맞춰 나름의 역사를 발전시켰으며 거기엔 보편도 우열도 없음을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여러 세계사 책을 읽으며 나는, 사람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 최선의 삶을 찾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노력은 패배를 동반하며,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싸우는 게 인간이라는 것도 배웠다. 한마디로 인간은 최선을 향한 불굴의 존재다. 이것이 내가 여러 권의 ‘벽돌 책’을 읽고 배운 사실(史實)이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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