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곳곳 점령한 ‘정당 현수막’… 안전사고에도 제지 못 해 [심층기획-정치 현수막 공화국]
별도 허가·신고 없이 15일간 게시 가능
마구잡이 설치에 사고 유발 위험 키워
선거마다 수백t 폐기물… 환경도 해쳐
정치 신인들·지자체장은 혜택서 소외
동에 1개 이하… 크기는 10㎡ 이내로
서울·울산시 등 관련법 개정안 건의
정치권 “남발 방지… 당 차원 자제 필요”
시대전환, 문제 심각성 인식 선구적 제안
공보물 최소 발행… 나머지는 온라인 제공
국회 문턱 못 넘었지만 ‘의미 있는 시도’
“연진아 네 아빠도 검사니?” “죄지었으면 벌 받아야지.”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되면서 정당은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유롭게 현수막을 걸 수 있도록 하는 예외 조항이 신설됐다. 지자체에 별도 허가나 신고 없이 15일간 현수막을 게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법이 시행된 지난해 12월부터 거리에 현수막이 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미관상 문제는 물론이고 안전사고까지 발생하는 등 전국에서 크고 작은 소란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달 13일 인천시 연수구 송도5동 행정복지센터 사거리 앞에서 전동킥보드를 타던 20대 대학생 A씨가 현수막 게시용 끈에 목이 걸려 넘어졌다. 이 사고로 성악을 전공하는 A씨는 목 부분에 찰과상을 입었다. 정당 현수막이 신호등을 가리거나 어린이보호구역에도 마구잡이식으로 설치돼 안전사고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수막 설치 주체인 정당 실무자들도 불만을 토로한다. 한 정당 관계자는 “2주마다 현수막을 바꿔야 하고,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계속 새로운 내용을 써야 하는데 정책 홍보보다는 정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현수막은 개당 제작비만 15만원 안팎에, 설치비용은 별도다. 정당들은 주로 후원금이나 국고보조금으로 현수막을 제작하는 만큼 사실상 청구서는 국민에게 돌아온다. 올해 1분기 국고보조금은 119억3000만원에 달한다.
현수막 사용이 늘면서 선거 후 버려지는 폐현수막 처리도 심각한 환경 문제로 지적된다. 폐현수막의 재활용률은 20∼30% 선에 불과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환경부에 따르면 2년 전 대통령 선거에 쓰인 현수막은 6만6144장, 무게로는 1111t에 달했다. 이때 쓰인 현수막 중 절반이 넘는 561t(50.5%)이 소각됐고, 나머지 277t(24.9%)은 매립되거나 관공서 창고에 보관됐다. 재활용률은 273t(24.6%)에 그쳤다.
녹색연합의 지난해 추산 자료를 보면 선거 기간인 2주간 사용된 홍보물로 인해 약 2만8082t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플라스틱 일회용컵 5억4000만개를 제작·사용할 때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과 비슷한 수준이다. 정규석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선거홍보물이 환경오염은 물론이고 정치 신인들에게는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온라인 전환과 현수막 사용 금지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 신인에겐 더 높은 현수막 장벽
정당 현수막 난립 이면에는 기득권 정치인의 카르텔과 정치 신인을 향한 차별도 자리한다. 정당의 정치 활동으로 현수막 사용을 제한하다 보니 정치 신인들은 마음대로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유권자에게 자신을 알려야 하는 지자체장들도 이 정당 현수막 규정에서는 벗어나 있다. 이 때문에 현역 의원의 잠재적 경쟁자인 지자체장의 볼멘소리도 나온다고 한다. 정당 한 관계자는 “정치 신인들도 자신을 알리고 싶지만 법적으로 허락도 되지 않고, 또 큰 비용이 드는 현수막으로 정치하는 게 사실상 어렵다”며 “일각에선 현역 의원만을 위한 현수막 특별법이란 푸념도 나온다”고 전했다.
현수막이 급증하면서 관련 민원을 직접 처리하는 지자체에도 비상이 걸렸다. 서울시는 지난 9일 논의 끝에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행정안전부에 전달했다. 울산시 등 일부 지자체들도 비슷한 의견을 행안부에 건의하기로 뜻을 모았다.
개정안에는 정당 현수막을 읍·면·동마다 1개 이하로 제한하며, 크기는 10㎡ 이내로 정했다. 또 신호기, 도로표지, 폐쇄회로(CC)TV 앞, 어린이·노인·장애인보호구역 등에는 설치를 금지하는 내용도 담았다. 여기에다 설치 전 관할 시·군·구에 통지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정당 현수막의 설치·관리에 관한 사항도 대통령령으로 위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논란이 확산하자 정치권은 뒤늦게 반응했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각 당이 자제해야 할 것이고, 법 개정으로 이런 일이 생겼는데 필요하다면 재검토해서 이런 것이 남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선거 현수막 줄이고 온라인 공보물로”
“현수막 등 선거폐기물 최소화 방안을 제안합니다.”
우선 당은 선거후보들을 대상으로 최소한의 공보물만 발행하고 나머지는 다 온라인으로만 제공, 열람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특히 현수막이나 명함 등은 정해진 수량만 발행하고, 또 제작 시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논의를 담아 시대전환 조정훈(사진) 의원은 그해 8월 말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선거마다 많은 양의 선거공보가 제작되고 폐기됨에 따라 자원 낭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며 “선거공보와 후보자정보공개 자료를 전자적 방식으로 작성할 수 있도록 하고, 세대원 모두가 동의하면 책자형 선거공보를 발송하지 않는 내용” 등을 담았다. 당초 현수막 내용도 개정안에 포함하려 했지만 다른 법안과의 중복 문제 등을 고려해 최종안에는 빠졌다. 아직 이 법이 국회 문턱을 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됐다. 국민의힘 엄태영 의원은 재활용이 쉬운 재질의 선거운동 현수막 사용을 강제하는 관련 법안을 같은 해 7월 제출한 바 있다. 이를 위반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4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정했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조 의원은 10일 통화에서 “시대전환은 선거에서도 현수막 사용을 최소화하고 온라인 공보물 활용을 최대화하고 있다”며 “소수 정당 입장에서는 비용이나 효과 측면에서 현수막 확대 분위기가 달갑지 않다. 환경 측면에서도 재활용도가 낮은 현수막이 보름 간격으로 교체되는 현 상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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