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연상 유부녀 선생님과 사귀기로 했습니다···이 사랑 영원할까요”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3. 11.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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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언제 이렇게 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더서펀트퀸’의 한 장면. 젊은 앙리2세(왼쪽)와 디안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 출처=IMDB>
[사색-12]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 저를 잡아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혼란과 좌절의 연속에서 그녀의 존재로 인해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등대였고, 인생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제 굳건히 자리를 잡은 지금, 못다 한 고백을 하려 합니다. 20살의 나이 차이도 상관없고, 사제관계라는 장벽도 개의치 않습니다. 유부녀면 또 어떤가요. 중요한 건 제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인걸요.”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사제 간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로망스의 한 장면. <사진 출처=MBC>
선생님을 사랑한 남자가 있습니다. 24살 연상, 그것도 유부녀임에도 개의치 않았지요.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이야기입니다. 지금 배우자인 브리지트와의 로맨스를 두고 누군가는 ‘세기의 사랑’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세기의 불륜’이라고 얘기합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15살이던 학창 시절, 연극반 선생님이었던 39살의 유부녀와 만남 끝에 15년 만에 결혼에 성공했기 때문이었죠.
“음 고등학교?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겠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9월 프랑스 레사블스돌롱에 있는 에릭 타발리 고등학교를 방문한 후 바라보고 있다. 2022.09.13 <로이터 연합>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이렇게까지 일 줄은 몰랐습니다. 20살 이상의 나이 차이, 사제관계, 유부녀와의 로맨스가 프랑스 역사에서 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앙리2세와 디안 드 푸아티에 이야기입니다. 네 사람의 이야기를 열두번째 ‘사색’에서 소개합니다.
유부녀 선생님과 사랑에 성공한 마크롱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근데 네가 남자로 보인다”

우선 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1993년 프랑스 아미앵 지역의 한 학교. 15살 마크롱은 활력이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예술에 관심이 많은 이 소년은 연극반 수업을 듣게 되었지요. 거기서 만난 선생님이 브리지트 마리클로드 트로뇌였습니다. 금발의 파란 눈, 눈에 띄는 미인이었지만, 그녀의 나이는 39세. 두 바퀴 띠동갑이었습니다. 마크롱의 연애상대로는 넘을 수 없는 나이 차이였지요.

“쟤네 둘이 진짜 24살 차이래요. 수군수군”. 2018년 4월 백악관을 국빈 방문한 마크롱 대통령이 부인에게 손 키스를 전하고 있다. 재밌는 건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도 24살 차이. 물론 성별은 정반대다. <사진 출처=백악관>
더구나 브리지트는 1남 2녀를 둔 유부녀였습니다. 그의 큰딸은 마크롱과 같은 반 학우. 미래 대통령의 결기를 이 때부터 보였다고 해야 할까요. 연극 수업을 하면서 마크롱은 브리지트에게 구애를 시작합니다. 그는 나이와 신분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 하나만 믿고 돌진해갔지요.
숱한 장애를 뚫은 마크롱의 결기
“선생님, 제가 하는 사랑 연기가, 진짜 연극으로 보여요?”

프랑스가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라도, ‘금기’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부모님이 마크롱의 저돌적이고 위험한 사랑을 알고서는 그를 아미앵에서 파리로 전학시켜버렸지요. 하지만 대통령이 될 자에게 거리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도 끝없이 브리지트에게 편지를 쓰며 “다시 돌아와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구애를 펼칩니다.

시사잡지 샤를리 앱도가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된 마크롱 대통령과 배우자 브리지트의 나이 차를 조롱하는 만평을 게재해 논란을 빚었다.
그의 열정 덕분이었을까요. 브리지트는 2006년 1월 남편과 이혼합니다. 이내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교사 자리를 구하지요. 마크롱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브리지트는 나중에 이를 회상하면서 “조금씩 내 저항이 무너졌다”고 했죠. 2007년 그들은 마침내 결혼합니다. 이미 둘이 연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백한 불륜”이라고 조롱하는 의견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프랑스 역사에서 반복된 여선생과 제자의 사랑
“저는 선생님밖에 없어요. 저 버리지 않을 거죠?”

자 이제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봅니다. 1520년대 프랑스입니다. 왕자 앙리2세는 외로운 아이였습니다. 어머니이자 프랑스의 왕비 클로드 드 프랑스는 다산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지요. 앙리2세의 나이 5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엄마의 품‘이 그리웠을 나이였지요.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앙리 2세의 어린 시절. 이때 디안 드 푸아티에와 처음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가 장 클루에가 그린 1520년대 작품.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그때 그의 양육과 교육을 담당하던 이가 디안 드 푸아티에였습니다. 큰 키에 사냥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 교양까지 겸비한 인물이었죠. 무엇보다 앙리2세의 지근거리에서 허한 마음을 채워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앙리2세는 엄마의 빈자리를 디안을 통해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안정을 찾던 앙리2세에게 또 한 번 시련이 닥칩니다. 아버지 프랑수아1세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5세에게 파비앙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수아1세는 포로 신세로 전락해 버렸지요.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단다.” 1571년 프랑수아 클루에가 그린 ‘목욕하는 여인’. 반라의 여인이 디안 드 푸아티에로 추정된다. 그녀는 당대의 미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일국의 왕이 타국의 포로로 오래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프랑수아1세는 왕자인 앙리2세를 스페인 왕실의 볼모로 제안합니다. 이국 땅에서 이방인들과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야 한다는 슬픔을 견뎌야했지요. 앙리2세의 나이, 겨우 7살이었습니다.

엄마 같은 디안과 떨어져야 한다는 불안도 컸습니다. 그러나 디안은 의연히 그를 위로합니다. “왕자님, 저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몸 건강히 꼭 돌아오세요.”

“저는 좀 그렇고, 제 아들 드릴게”.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1세(왼쪽 세 번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카를5세(왼쪽 다섯번째)와 라이벌이었지만 중요한 전투에서 늘 패배했다. 앙리2세가 포로로 잡히게 된 배경이었다.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타데오 주카로가 1538년 그린 ‘니스의 휴전’.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어린아이에서 의젓한 기사로…불꽃 사랑이 시작되다
4년 후, 그가 귀환합니다. 11살의 나이.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앙리2세는 고향을 떠날 때의 치욕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더욱 증오하게 되지요. 동시에 자신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낸 디안을 향한 사랑은 더욱 애틋해집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제법 청소년 티가 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공개적으로 구애를 시작하지요.
“디안, 이제 난 어엿한 사내라오”. 청년 시절 앙리2세를 묘사한 초상화.
“나는 한 사람의 기사로서 당신을 사랑하오.” 앙리2세는 기사도로 무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기사는 한 여인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결기를 드러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 여인이 앙리2세에게는 디안이었죠.

당시 기사도의 문화에 따라 자신이 디안을 위한 기사가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서약합니다. 디안은 그러나 유부녀였습니다. 마크롱과 브리지트 영부인의 첫 만남과 같은 상황이었지요.

엎친 데 덮친 격일까요. 아버지 프랑수아1세가 앙리2세의 결혼을 추진합니다. 물론 상대는 디안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럽 최강국인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청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7세의 조카와 결혼시키로 한 이유였지요. 그 유명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였습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앙리2세와 디안, 그리고 카트린까지.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삼각관계의 서막이 열리다
“어느새, 꼬마가 남자로 보였습니다”

사랑은 장애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요. 앙리2세는 결혼 이후 더욱 열렬히 디안에게 구애합니다.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힌 디안도 어느새 앙리2세가 남자로 보입니다.

마침 남편과도 사별했기에 몸도 마음도 적적했지요.(디안의 남편은 40살 연상의 귀족이어서 이른 죽음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잘 생기고 훌륭한 기사로 성장한 앙리2세를 결국 받아들입니다. 앙리의 나이 15세, 디안의 나이 35세였지요. 디안으로서는 아버지뻘 남편과 살다가 이제는 아들뻘 애인이 생긴 셈입니다.

디안 드 푸아티에의 젊은 시절. 작자미상.
앙리2세의 나이 어느덧 28살. 그가 프랑스 최고의 권력인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자연스레 디안은 프랑스의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참고: 공개불륜도 모자라 고가 부동산까지 상간녀에게 바친 ‘이 남자’) 자리에 오르지요. 앙리2세는 프랑스의 대원수였던 안 드 몽모시와 디안에 국정을 맡깁니다.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도, 누나라고도 하지마. 내 여자라고 불러줘”. 디안 드 푸아티에는 결국 앙리2세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디안은 왕의 마음을 흔들어 나라를 망치는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앙리2세에게 왕비인 카트린과 어서 빨리 아이를 낳으라는 당부를 했을 정도였지요. 앙리2세가 카트린과 낳은 아이를 정성껏 돌본 사람 역시 디안이었습니다. 심지어 앙리2세가 다른 여성들(필리파 두시, 쟈넷 스튜어트 등)과 관계해도 너른 마음으로 그를 품었습니다.
“내 남편 꼬신 나쁜 년”...“걔가 먼저 꼬셨거든요 흥”. 카트린 드 메디시스(오른쪽)과 디안 드 푸아티에. 드라마 ‘더서퍼트퀸’의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속이 타들어 가는 카트린...노스트라다무스를 만나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대접을...”

하지만 카트린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그녀가 누구입니까. 유럽 최고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상속녀였지요. 유럽 유수의 왕가가 탐내는 집안이었고, 삼촌은 종교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교황 클레멘스7세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대 놓고 바람을 피우다니요.

공허한 마음을 달랠 이가 필요 했습니다. 그때 그 옆을 지킨 사람이 있었습니다. 점성술과 예언으로 유명한 이 사람, 노스트라다무스였지요. 카트린은 그의 예언과 점성술로 희망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유? 저주라도 걸어드릴까?~”. 노스트라다무스는 카트린을 달래주면서 왕실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아들 세자르 데 노트르담이 그린 노스트라다무스 초상화. 1614년 작품.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앙리 2세의 죽음, 그리고 복수의 시작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카트린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앙리2세가 스페인과 카토-캉브레지 조약(Peace of Cateau-Cambresis)을 체결하던 1559년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땅에서 프랑스 권력을 포기한다는 굴욕적인 조약이었지요. 앙리2세는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를 스페인 왕 펠리페2세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시집을 보냈습니다.

결혼 축하연 자리, 전쟁에서 지고 딸도 빼앗기듯 시집보낸 앙리2세는 몹시 화가 난 상태였을 겁니다. 그 울분을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마상시합으로 풀 속셈이었겠지요. 프랑스의 우군이었던 스코틀랜드의 근위대장과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와 자웅을 겨룹니다. 그리고 몽고메리의 부러진 창 파편이 앙리2세의 눈에 박혔지요. 그는 그렇게 사경을 헤맸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저주라도 걸린 것일까. 앙리2세는 마상시합 도중 창에 눈이 찔려 사망하기에 이른다. 당시 마상시합을 그린 독일판화.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카트린의 손에 이뤄진 적폐청산
“마지막으로....마지막으로....디안을 불러주세요.”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복수는 이제부터였습니다. 앙리2세는 임종 직전 디안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카트린은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죠. 그 동안 쌓여있던 울분을 이제서야 풀기 시작한 것이었을까요. 앙리2세는 힘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디안을 못 본 채 말이지요.

앙리2세와 디안이 사랑을 나눴던 샤토 드 슈농소. 카트린이 디안의 이 성을 빼앗았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적폐청산의 시간입니다. 그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 수행됐지요. 카트린은 디안에게 샤토 드 슈농소를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디안과 앙리2세가 사랑을 나눴던 공간입니다. 대신 훨씬 급이 떨어지는 성인 샤토 드 쇼몽을 건네주었습니다. 앙리2세가 주었던 보석 역시 “국가 유물”이라는 이름으로 반환을 명합니다.
샤토 드 슈농소에 새겨진 프랑스 왕실 상징. 앙리2세 사후 왕비 카트린은 이 성에 자신의 이름 이니셜 ‘C’와 앙리2세의 이니셜 ‘H’를 새겼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디안을 의미하는 ‘D’가 겹쳐보인다.
샤토 드 슈농소에는 앙리2세와 디안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었습니다. 앙리2세는 자신의 성 H와 디안의 이니셜 D를 따서 성 여러 곳을 장식했지요. 카트린이 이를 차지한 이후 D를 자신의 이니셜 C로 바꿔놓습니다.

디안은 프랑스 중북부 아네트에서 조용히 삶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의 나이 64세였습니다. 왕비 카트린은 그 이후 프랑스를 격변으로 몰아넣는 중추적인 인물로 자리합니다.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거야”. 드라마 더서펀트퀸의 한 장면. 카트린(맨 왼쪽)이 앙리2세와 디안을 등진 채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출처=IMDB>
죽어서도 앙리2세는 디안과 함께하지 못했다
프랑스 왕들의 무덤인 파리 북부 생드니 성당으로 가봅니다. 이곳에 앙리2세와 카트린의 장엄한 묘가 자리합니다. 왕족 묘 중에서는 걸작 중 걸작으로 불립니다. 카트린은 잠든 듯 편안해 보이지만 앙리2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듯 머리가 젖혀진 모습입니다.
“조강지처 버리면 죽어서도 괴롭습니다”. 프랑스 파리 생드니 대성당에 마련된 앙리2세와 카트린의 석상. 앙리2세는 카트린과 달리 괴로운 듯 고개를 젖히고 있는 모습이다. 조강지처를 버린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카트린의 복수극이었을까요. 불륜한 남자는 사후에까지 고통받는다는 메시지를 남김으로써 말입니다. 사랑의 선후관계야 어찌됐든, 조강지처를 향한 배신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기 마련입니다.

<네줄요약>

ㅇ프랑스 대통령 마크롱과 부인 브리지트는 24살 차이의 사제지간이었다.

ㅇ16세기 왕 앙리2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도 20살 연상의 선생님이었으나, 그와 사랑에 빠졌다. 불륜의 평행이론이었다.

ㅇ앙리2세의 사랑을 못 받은 부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점성술사 노스트라다무스에 의지했다. 이 덕분인지 앙리2세는 마상 창시합에서 사고로 죽었다.

ㅇ조강지처가 좋더라, 썬연료는 모르겠다.

<참고문헌>

ㅇ김복래, 프랑스 왕과 왕비, 북코리아, 2021년

ㅇ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김영사,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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