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2023. 3. 1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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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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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편〉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일부 상상력을 더해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제주도 푸른 밤의 공기는 서글펐다.

1844년, 추사(秋史) 김정희는 낡은 집에 혼자 있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을 견디고 있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이 사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일)였다. 멀리 귀양을 보내고는 좁은 집에 밀어넣는 일이었다. 사실상 감옥형이었다. 탱자나무 가시덤불 울타리까지 끔찍하게 깔려있었다. 여러 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엉성한 벽 틈에선 찬바람이 들어왔다. 환갑을 앞둔 추사의 몸에 냉기가 덕지덕지 붙었다. 그럴수록 외로움도 뒤룩뒤룩 살쪄갔다. 추사는 평생 고생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에게 제주 유배는 고역이었다.

달빛이 한지 문살을 뚫고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 기력 잃은 눈, 쏙 들어간 볼…. 풍토병에 걸린 추사가 여윈 팔을 내밀었다. 달빛을 손바닥 위로 올렸다.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렸다. 이 영롱한 빛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래, 매정하게 떠날 것이라면 처음부터 곁을 주지 말아야지. 달빛이 사람보다 지혜롭구나." 추사는 혼잣말을 했다. 한양의 여러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초라해진 신세에 많은 이가 등을 졌다. 좋을 때는 무엇이든 내줄 듯했던 인간들도 고개를 다 돌렸다. 서러움이 또 차올랐다.

눈물이 얼굴을 적실 때면 그의 유배 중 숨진 부인 예안 이씨가 그리워졌다.

'내가 사는 동안 다시 부부가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먼저 죽어 그 사람에게 배우자를 빨리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구나….' 추사는 자신이 쓴 문장을 되읊었다. 이별을 생각하니 비슷한 시기 죽은 절친 김유근도 떠올랐다. 가슴의 사무침은 끝이 없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면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 [Wikimedia Commons]

그렇기에 추사는 제자 이상적이 더욱 고마웠다.

이상적은 한결같았다. 추사를 외면하지 않았다.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 시절 추사의 낙은 독서였다. 역관(譯官·통역, 번역 등 역학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 관리) 이상적은 그런 추사에게 책을 보냈다. 청나라를 드나들며 얻은 희귀한 책도 아낌없이 보내줬다. 이상적은 추사에게 경세문편(經世文編)까지 선물했다. 큰돈을 주고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었다. 잘나가는 벼슬아치에게 바쳤다면 출세도 할 수 있는 서적이었다. 이상적은 그런 보물을 추사에게 줬다. 바다 멀리에 갇혀있는 뒷방 늙은이에게 건넨 격이었다. 추사는 그 책을 품에 안았다. 눈물을 펑펑 흘렸다.

추사는 그런 이상적에게 보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추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돈을 보낼 수도 없고, 관직을 터줄 수도 없었다. 추사는 오직 마음만 표할 수 있었다. 추사는 잔기침을 하며 먹과 종이를 꺼내왔다. 수묵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추사는 송나라 소동파(蘇東坡·중국 북송 때 제1의 시인)의 언송도(偃松圖)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소동파도 유배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소동파를 위로하기 위해 먼 곳에서 아들이 찾아왔다. 언송도는 아들의 정성에 감격한 소동파가 그려준 작품이었다. 추사는 과거 소동파와 아들의 관계가 지금 자신과 이상적의 사이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추사는 붓을 들었다.

창문 하나 그려진 작은 집을 그렸다. 자신의 비루한 처지였다. 듬성듬성 잎을 매단 늙은 소나무를 그렸다. 잣나무 세 그루도 표현했다.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두 나무, 추사와 이상적의 관계였다. 추사는 그림을 그리면서 논어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자한(子罕)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였다. '겨울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었다. 추사는 이 그림을 세한도(歲寒圖)로 명명했다.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네. 그대가 나를 대함이 귀양을 오기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으니, 그대는 공자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그는 제발문(題跋文·서화에 기록하는 감상문)을 이렇게 썼다.

“이 아이는 절대 붓을 잡게 하지 말게”
추사 김정희 고택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코리아넷]

추사는 1786년 6월 조선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 장남으로 세상에 나왔다. 유씨 뱃속에서 24개월을 버티다 빛을 봤다는 말이 있다. 태어날 무렵 시든 뒷산 나무들이 벌떡 일어섰다는 설도 있다. 전설에 가깝다. 모두 근거는 없다. 추사가 집안을 타고난 건 확실했다. 손꼽히는 가문이었다. 그의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함께 조선 후기 양반가를 대표했다. 추사는 훗날 근 10년의 유배 생활을 한다. 그렇게 되리라곤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고결한 명문가였다.

추사는 아기일 때도 심상치 않았다.

추사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붓을 갖고 놀았다. 김노경이 뺏으려고 하면 끝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억지로 가져가면 틀림없이 울었다. 도로 돌려주지 않고서는 달랠 수 없었다. 추사는 어릴 적부터 예술가의 기질을 보였다. 까칠하고 예민했다. 명문가 자손 특유의 자존심도 강했다. 그 성질은 변하질 않는데, 훗날 "추사는 까다로워도 보통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였다.

추사 김정희 고택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코리아넷]

추사가 어릴 때 이런 일도 있었다.

"글이 기가 막힌다!" 어느 날, 채제공이 추사 집 앞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당대 최고의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런 이가 추사 집 대문에 붙은 입춘첩(立春帖)을 보물 보듯 살펴봤다. 추사가 쓴 것이었다. 겨우 7살 때였다. "대감, 어찌 소인의 집에 찾아오셨습니까." 채제공이 홀린 사람처럼 문을 두드리자 김노경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채제공과 김노경 일가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김노경은 더 당황했다.

"누가 썼나. 대문에 붙은 글씨 말이야."

"우리 애가 썼습니다." 채제공의 뜬금없는 말에 김노경이 대답했다. 겨우 '우리 애'…? 채제공은 흠칫했다. 채제공은 김노경의 지긋이 쳐다봤다. "이보게, 노경이." 채제공이 목소리를 무겁게 깔았다. 그의 이런 행동에 김노경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네 아이 말이야.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게야. 하지만 글씨를 잘 쓰면 반드시 운명은 기구할 것이네. 절대 붓을 잡게 하지 말게." 채제공은 이 말을 툭 던지곤 신선처럼 떠났다. 추사가 겪을 생을 보면 소름 돋는 예견이었다.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가 가르치다
박제가.

그 또한 어릴 적부터 서화의 재주가 뛰어났다.

신동이란 말을 달고 살았다. 천재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의 이름은 박제가였다. 청나라 문물을 참고해야 한다고 한 북학파의 핵심이었다. 박제가가 볼 때 추사는 자기 어릴 적 모습을 쏙 닮았다. 날카로운 두 눈, 늘 할 말이 많은 듯한 뾰로통한 입 모양까지 똑같았다. 이 녀석을 직접 키워보고 싶었다. 그 마음은 추사의 입춘첩을 본 뒤 더욱 강해졌다. "이 아이는 내가 직접 가르치고 싶소." 박제가가 김노경에게 제안했다. 박제가를 높이 산 김노경은 바로 수락했다.

추사 김정희, 적설만산(積雪滿山)

추사는 박제가를 통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났다.

조선을 넘어 청나라까지 공부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팔을 뻗었다. 추사는 그사이 몇 차례 흉사를 겪었다. 10대에 할아버지와 친어머니가 죽었다. 1800년, 열다섯 나이로 한산 이 씨와 결혼했으나 5년 만에 사별했다. 뒤이어 정신적 지주였던 박제가도 사망했다. 추사는 고통을 거듭 마주했다. 매 순간 외로움에 절여졌다. 추사는 그럼에도 삶을 무력하게 대하지 않았다. 박제가가 죽고서도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1808년에는 예안 이씨와 재혼도 했다. 슬픔은 슬픔이고 삶은 삶이었다.

추사는 그 덕에 20살 전후부터 나라 안팎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서도를 잘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1809년, 추사는 내공을 키울 기회를 잡았다. 말로만 듣던 청나라를 방문했다. 동지부사(同知府事) 일을 맡은 김노경이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갈 때 따라갔다. 자제 군관 자격이었다. 그가 24살 때였다. 추사가 본 청나라는 역동적이었다. 활기가 가득했다. 진귀한 서양 문물도 보였다. 스승 박제가 말이 맞았다. 청나라를 더는 오랑캐로 볼 수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조선보다 훨씬 세련된 곳이었다.

옹방강.
김정희와 옹방강이 글로 주고받은 필담서. [추사박물관]

추사는 청나라에 60여일간 머물렀다.

그는 그 기간 청나라 최고의 석학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을 만났다. 추사는 청나라 최고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을 특히나 좋아했다. 추사는 옹방강의 서화에 감탄했다. 그의 소동파 컬렉션도 대단했다. "동쪽 나라에 이렇게 영특한 사람이 있었던가." 옹방강도 추사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다.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경전, 예술, 문장이 조선에서 가장 뛰어나다)'이라는 휘호도 써줬다. 청나라 제자들도 편히 갈 수 없던 그의 서재에 마음껏 들어가게 했다. 추사는 옹방강에게 글과 그림을 다시 배웠다. 기교와 멋 부림이 예술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 노학자는 추사가 떠날 때 각종 책을 잔뜩 안겨줬다. 둘은 옹방강이 사망한 1818년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아버지의 유배, 거듭 발목을 잡다
추사 김정희, 수식득격(瘦式得格)

1821년, 추사는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나이로 34세였다.

이후 아버지 김노경도 잘 풀렸고, 아들 추사도 잘나갔다. 10년쯤은 행복했다. 인생 황금기였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 1830년, 김노경이 탄핵의 칼을 맞았다. 김노경은 늙어서도 강직한 정치인이었다. 핵심 권력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모두에게 미움받았다. 융통성 없이 곧 죽어도 바른 소리만 하니 예뻐 보일 리 없었다. 죄라면 그게 죄였다. 순조는 김노경을 강진현 고금도로 귀양 보냈다. 절도안치(絶島安置·죄인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보내는 일)였다. 당시 순조는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따위 것밖에 없다"는 투로 아쉬워했다는 말이 있다. 순조는 김노경을 쫓기 싫었다는 얘기인데, 안동 김씨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다는 설이다.

추사는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두 팔 걷고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했다. 꽹과리까지 쳤다. 몸을 사려도 모자랄 때였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다.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일도 그만두고 밤낮 난리를 쳤지만 그뿐이었다. 그나마 김노경은 1년 만에 돌아왔다. 순조의 배려였다. 김노경과 추사 모두 조정으로 복귀했다. 이후 김노경은 1837년에 사망했다.

추사 김정희,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이제 억울한 수모를 겪을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 건 추사의 실수였다.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교적 안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훈풍은 잠시였다. 김노경을 친 세력들이 다시 움직였다. 이들은 이제 추사를 공격했다. 가만 보니 김노경의 아들이란 놈이 아비보다 더 총명하고, 더 꼿꼿했다. 이놈을 놔두면 역풍이 불 게 분명했다. 안동 김씨는 추사를 김노경보다도 악랄하게 괴롭혔다. 이들은 김노경의 옛일까지 들고 왔다. 1년짜리 절도안치, 그 사건을 또 거론했다. 안동 김씨는 이미 죽은 김노경에게 추죄(追罪·이미 저지른 죄에 대해 꼬치꼬치 캐어 따짐)의 형벌을 내렸다. "아비가 죗값을 치르지 못하면 아들이 대신 감당해야지." 억지로 만든 죗값을 추사에게 뒤집어씌웠다. 추사는 이들의 잔인함에 혀를 내둘렀다.

추사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는데, 내가 정확히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가문, 우리 조정에 누가 될 일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추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죽을 만큼 맞았다. 정말 목숨이 위태로웠다. 보다 못한 우의정 조인영이 상소를 올렸다. 추사의 친구였던 그는 "추사를 살려주십시오"라는 글을 썼다. 추사는 그 덕에 겨우 살았다. 대신 유배를 갔다. 1840년부터 8년3개월간 제주도에 갇혀 살아야 했다. 사회적 사망 선고였다.

“상적! 이 추사를 잊지 말게나”
추사 김정희, 세한도

제주도 붉은 아침의 공기는 처연했다.

추사는 가시덤불을 파고 들어갔다. 뻗은 가시가 팔다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흰옷이 붉게 물들었다. 핏방울은 발자국처럼 찍혔다. 평생 도련님처럼 산 추사에게 긴 유배 생활은 고통이었다. 옷은 거칠고 음식은 투박했다. '이제 추사는 끝났다'는 말이 도는지, 서울 친구들의 연락도 뜸해졌다. 반대파들은 추사를 계속 핍박했다. 이들은 추사의 눈물을 원했다. 고통에 젖은 얼굴, 일그러진 표정, 패배자의 무력함을 보여주길 바랐다. 하지만 추사는 이자들이 원하는 걸 줄 생각이 없었다. 추사는 속으로 울었다. 울분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나마 가족에게 툴툴대긴 했지만 그 정도뿐이었다. 덧없는 인생, 이 수난 또한 지나갈 것이었다.

제자 이상적은 추사를 잊지 않았다.

나락으로 간 추사를 가여워했다. 그래서 이상적은 책을 보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귀한 책도 다 부쳤다. 이상적의 손에서 추사의 손으로 넘어간 책은 100권이 넘었다고 한다. 추사가 감격해 세한도를 보낸 이유였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일부 확대)
추사 김정희, 세한도(일부 확대)

'이상적은 이 그림을 잘 감상하시게!'

이상적은 바닷바람을 품고 온 그림을 펼쳤다.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船是賞)'이라는 글이 있었다. 이상적의 호가 우선이었다. "상적이, 그림은 잘 보고 있나?" 이 글자에서 추사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인장도 있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성어가 찍혔다. '오래도록 서로를 잊지 말자'는 뜻이었다. "나는 상적의 정성을 잊지 않겠어. 상적 또한 이 추사를 잊지 말게나. 우선! 고맙고, 또 고맙네." 추사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이상적은 그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뭉클했다. 그는 그림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림 속 늙은 소나무는 추사였다. 푸르름이 있는 잣나무는 이상적이 틀림없었다. 넓은 여백에는 추사의 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사실 추사의 그림이 기술적으로 잘 그렸다고 보긴 어려웠다. 원근법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문인화(文人畵)가 가장 중요시하는 화가의 심정, 사의(寫意)를 이토록 절절하게 담은 그림은 그간 없었다. "…엎드려 글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분수에 넘치게 저를 칭찬해주셔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청나라에 가면 그곳 문인들에게 두루 보여주겠습니다." 이상적은 곧장 답장을 보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일부 확대)
추사 김정희, 세한도(일부 확대)

이상적은 그의 약속대로 추사의 그림을 연경에 챙겨갔다.

이런 작품을 혼자 보는 건 죄라고 생각했다. 이상적과 친한 청나라 문인들이 모였다. 이들은 추사의 처지에 슬퍼했다. 추사를 생각하는 이상적의 의리에 감동했다. 문인 16명이 세한도를 두고 송시와 찬문을 썼다. 후에 오세창, 정인보 등 조선 문인 4명도 감상평을 썼다. 세한도의 원래 길이는 70cm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의 '댓글'이 더해지니 14m의 대작이 됐다.

추사 김정희, 계산무진(가로세로를 혼용한 공간 구성) [예술의전당]

 

추사 김정희, 설암게(코끼리 모양을 닮은 옛 한자 원형을 그려넣어 추상화 느낌을 낸 것이 인상적이다.) [간송미술관]

응원을 받은 추사는 더욱 힘을 냈다.

이렇게나 많은 이가 자신을 생각해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재기의 희망이 타올랐다. 세한도가 추사에게 삶의 의지도 되찾아준 셈이다. 추사는 제주 유배 중 새로운 글씨체도 만들었다. 추사체다. 청년 시절 청나라에서 만난 두 석학, 옹방강과 완원의 이론을 하나로 묶었다.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서체도 되짚었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뽑아냈다. 그 결과 서투른 듯 맑고, 강건한 듯 고아한 글씨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평생 벼루 10개 망가뜨렸다
추사 김정희

하지만 추사의 팔자는 끝내 사나웠다.

1848년 12월, 추사는 8년3개월의 유배를 마쳤다. 서울로 겨우 돌아왔다. 폭삭 늙은 추사는 한강변에 집을 구해 살았다. 그런데 고작 2년 후 추사는 또 모함을 받고 유배 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북청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다행히 1년으로 끝났지만, 추사는 삶의 의지를 잃었다. 성질은 죽었다. 불같은 기운도 더는 없었다. 그저 기진맥진해보였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고 할 때는 (…)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 이는 타고난 못난 성품을 인내로 담금질해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기적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철학자 맹자(孟子)와 고자(告子)의 논쟁이 담긴 『고자장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하늘은 추사에게 엄청난 사명을 안기려고 한 게 분명하다. 다만, 언젠가 추사를 만난다면 그럼에도 이토록 박복한 삶을 안긴 데 대해 해명해야 할 터였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쓴 봉은사 판전 현판 탁본. [예산군 추사고택]

북청에서 돌아온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조용히 살았다.

1856년, 추사는 승복을 입고 봉은사로 들어갔다. 같은 해 10월에 과천으로 돌아와 삶을 마쳤다. 나이는 71세였다. 추사는 죽기 전날까지 작품 활동을 했다.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알려져 있다. 눈 감기 전 나흘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추사는 평생 벼루 10개에 구멍을 냈다. 아울러 붓 1000자루를 못 쓰게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추사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해 여러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 때로는 거리낌 없는 바를 행했으나 사람들이 자황(雌黃: 문자와 어구를 첨삭함)하지 못했다. (…) 어린 나이에는 영명을 드날렸지만, 중간에 가화(家禍·집안에 일어난 재앙)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나라의 소동파에게 견주기도 했다."

추사가 죽자 사관은 이런 글을 남겨 그를 기렸다.

쿠키 : 세한도는 돌고돌아…
추사 김정희 고택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코리아넷]

"어르신. 세한도는 조선의 것입니다. 조선 땅에 있어야 합니다. 부탁합니다. 부디 돌려주십시오."

"크흠!" 1944년, 그러니까 추사가 죽고서 88년이 흐른 그해 여름. 손재형이 후지즈카 지카시에게 매달렸다. 일본 도쿄에 있는 지카시의 집까지 찾아와선 몇 날 며칠을 애원했다. 병석에 누워있는 지카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보게. 나 또한 추사를 평생 존경했다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란 말이오." 지카시는 거절했다. 노환 탓에 기운이 없을 뿐, 목소리는 차가웠다.

추사의 세한도는 어쩌다 일본에 갔을까.

사연은 이랬다. 1865년, 추사에게 세한도를 선물 받은 이상적이 죽었다. 이후 이 그림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에게, 김병선의 아들 김준학에게 넘어갔다. 김준학은 평안감사 출신의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에게 세한도를 넘겨줬다. 민영휘는 아들 민규식에게 물려줬다. 그런 다음 추사를 연구하던 당시 경성제대(서울대) 교수 지카시의 손에 들어갔다. 1944년 여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였던 그 해 지카시는 모든 살림살이를 들고 도쿄로 돌아갔다. 세한도도 당연히 꽁꽁 싸매 들고 갔다.

서예가 손재형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추사 작품 수집가였던 손재형은 배를 타고 곧장 도쿄로 넘어갔다. 지카시의 집을 수소문 끝에 찾았다. 문을 두드렸다. "세한도를 넘겨주십시오." 들어가선 다짜고짜 요청했다. 지카시는 그를 경계했다. 단칼에 거절했다. 손재형은 그 거절을 거절했다. 손재형은 지카시의 집 옆에 숙소를 잡았다. 2개월간 지카시에게 매일 문안 인사를 올렸다. 광기 어린 정성이었다. 지카시는 끝내 고집을 꺾었다. 맏아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세한도는 저 남자에게 넘겨주라"며 미리 유언을 했다. 손재형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세한도를 받기를 원했다. 마침내 지카시는 "당신이야말로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다"며 작품을 건네줬다.

"제가 어떻게 사례하면 되겠습니까."

손재형이 물었다. 지카시는 고개를 저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 아니오. 한 푼도 받지 않을 테니 보존만 잘해주시오." 이 말이 끝이었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갖고 귀국했다. 그리고 3개월쯤 지난 1945년 3월10일, 지카시의 연구실에 포탄이 떨어진다. 수많은 서적과 서화가 타버린다. 세한도 또한 한 줌의 재가 될 수 있었다.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손창근 씨.[문화재청]

훗날 손재형은 정계에 투신했다.

그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며 돈을 많이 잃었다. 자금이 필요했다. 수백 번 고민한 끝에 소장품을 처분했다. 세한도도 저당 잡혔다. 손재형은 고군분투했으나 정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한도는 개성의 인삼무역상 손세기에게 넘어갔다. 손세기 또한 세한도를 무척 아꼈다. 개인금고 안에 모셔두는 등 특별대우를 했다. 서강대에 고서화 등 200점을 기증할 때도 세한도만은 남겨뒀다.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 씨가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게 얼마 전, 2020년 일이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은 "평소 근검절약해 수집한 문화재를 아무 조건이나 대가 없이 기증하겠다는 손창근 선생의 결단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내고 후손에게 돌려주는 소임을 다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라며 감사 뜻을 전했다. 손창근 씨는 문화훈장 중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참고 자료〉

『추사가의 한글편지들』, 김일근, 건국대학교출판부

『추사 김정희』, 유홍준, 창비

『추사 김정희 평전』, 최열, 돌베개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2)“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3)“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4)‘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5)“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6)“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7)‘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8)“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9)“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0)“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1)“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2)“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3)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4)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5)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16)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17)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18)“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19)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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