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처절한 트라우마를 정교하게 기록하다[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기자 2023. 3. 1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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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얼 드라이브
나타샤 트레스웨이 지음·박산호 옮김
은행나무 | 276쪽 | 1만5000원

대학 시절, 시를 쓰는 친구들이 곁에 많았다. 시를 쓰겠다고 처음 자청하던 그때엔 시에 대해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깊은 우정을 맺는 게 불가능한 줄 알았다. 그렇게 시 친구들과 시모임을 하면서 주야장천 시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각자의 습작시를 함께 읽고 둘러앉아 더 좋은 시가 될 수 있도록 토론을 하다 보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서로의 개인사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 일들이, 기억하는 방식들이,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는 태도가 시 속에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대개 불행을 다룬 문장들이었다. 무릎이 닿을 정도의 작은 스터디룸에 모여 앉아 있지만 나는 홀로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를 잠시 스쳐간 욕망이 지금도 또렷하다. 이들처럼 좋은 시를 쓰려면 나에게도 징글징글한 상처가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 욕망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불행이란 게 당연하게도 유독 나만 비켜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행이 엄습했을 때에 인간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고, 누군가에게 말로 꺼내기에 어떤 불행은 그 크기가 거대해 목구멍과 입술이 너무나 작게 느껴져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나마 힘없이 연필을 그러쥐고 그 이야기를 더듬더듬 시로 적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시를 적어내려가던 공책의 한 페이지는 신의 손바닥과 다름없었다. 그 이후로, 불행과 시의 상관관계에 대한 은밀한 탐구는 지금껏 내가 가장 열심인 분야가 되어갔다.

미국의 여성 시인 나타샤 트레스웨이의 <메모리얼 드라이브>는 시인의 처절한 트라우마를 정교하게 기록한 에세이다. 인종차별과 가정폭력 속에서 필사적으로 딸을 지키려 하다, 백인 남편으로부터 살해된 자신의 엄마 퀜덜린 앤 턴바우를 추모하는 회상록이다. 시인은 이 이야기가 끝나가는 즈음에서, “우리 이야기에서 가장 절실하게 피해왔던 부분을 쓰려고 마침내 자리에 앉았을 때. 내가 억지로 기운을 내서 마침내 그 모든 증거를 읽어보게 됐을 때 나는 바닥에 쓰러져 방금 막 엄마의 죽음을 알게 된 것처럼 애끓는 소리로 울부짖었다”라고 적어두었다.

극한의 불행한 사건을 겪고 한 개인이 그것을 트라우마로 오래 간직해왔을 때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흔적들. 불행한 사건의 순간이 조금씩 조금씩 과거라는 세월 속으로 흘러들어갈 때까지, 해안가의 단단한 조개껍질처럼 그 모든 썰물과 밀물들을 온몸으로 견딘 시간들. 거듭 변주되며 반복되는 악몽들로 인해 더더욱 되살아나 생생해지는 과거들. 과거의 시간이 고유한 장소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는 발걸음들. 들춰내어 직면하기엔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봉인된 시간처럼 간직돼온 듯하지만, 실은 숱하게 방문하며 노크해온 소리들. 문 바깥에서 자주 돌아섰던 인기척들. 그 겹겹의 흔적들에는 사건을 겪었던 열일곱 살의 트레스웨이와 삼십년이 흘러서야 이 이야기를 온전히 기록하게 된 트레스웨이를 비롯해서, 더 많은 트레스웨이들이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그 겹들을 나란히 세워두는 것이 이 <메모리얼 드라이브>의 구성방식이다.

시를 처음 쓰던 그 시절에 <메모리얼 드라이브>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책을 읽던 도중에 처음 들었던 생각이었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에는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 곁에 앉아서 이 책을 또박또박 발음해가며 읽어주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내 책상에 앉아 읽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읽었다는 느낌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느낌은 트라우마를 다루는 그녀의 반복적이고도 필사적인 기억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에겐 수많은 그녀가 있어왔다. 사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누구나 그걸 잘 챙겨서 글로 쓰지는 못한다. 수많은 그녀가 더 수많은 그녀들을 향해 자신의 기억을 창문처럼 열어두는 것.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열어두는 것.

나타샤 트레스웨이는 이 이야기를 시에도 자주 표현했다.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시집 <네이티브 가드(Native Gaurd)>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돼 있다. 이 시집을 읽을 때 ‘엄마’라는 단어와 만날 때마다 <메모리얼 드라이브>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트레스웨이의 시 속에서 ‘엄마’라는 단어는 꿈속에 나타나는 엄마처럼 느껴진다. 과거의 일들도 ‘지금’처럼 되살아난다. 그래서 영원할 것 같은 현재성이 이미지로 배어나온다. 모두의 엄마처럼 확장되어 독자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반면, 에세이 속의 ‘엄마’는 나타샤 트레스웨이의 엄마, 퀜덜린 앤 턴바우이다. 개인의 서사가 정교하고 온전하게 건축된다. 정교함이 곧 생생함이 되므로 바로 어제의 일처럼 소환된다. 정확한 기억과 필사적인 서술이 빚어낸 정교함은 이 세상을 향한다. 고발의 목소리가 된다. 시가 가진 정치성과 에세이가 가진 정치성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네이티브 가드>와 <메모리얼 드라이브>를 나란히 두고 읽으며 새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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