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 강화' 국민연금 프레임 보도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
정부, 주주권 행사 결정하는 수책위에 전문가단체 몫 추가
시민단체 "금융자본과 재벌 이해 대변 단체 대부분, 자본의 장악 시도"
이해관계 첨예한 수책위 조정에도 일부 언론은 '전문성 강화' 주장
"언론 국민연금 때리면 정부 호응하는 모양새" "언론은 이해관계 자유롭나"
[미디어오늘 박재령 기자]
정부가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며 국민연금의 주주권 및 의결권 행사를 결정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 위원 구성을 조정했다. 그간 국민연금의 수익률을 지적하며 전문성이 낮다고 비판해 온 언론보도가 실질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정권과 자본의 국민연금 장악시도”라며 시민단체가 반발하고 있지만 보도에서 동등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대신 국민연금의 '전문성 강화'라는 프레임이 반복됐다.
지난 7일 열린 제1차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선 전문가단체 추천 전문가 3명을 수책위원(9명)에 포함시키는 안이 의결됐다. 기존 수탁위원은 상근 3명과 비상근 6명 모두 가입자단체(사용자·근로자·지역가입자) 추천을 받아 위촉됐지만 가입자단체 몫을 6명(상근3, 비상근3)으로 줄이고 전문가단체 몫을 3명(비상근)으로 늘린 것이다.
수책위는 박근혜 정부 당시 삼성물산 제일모직 합병 과정의 국정농단 재발을 막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위원회로 주주권 및 의결권 행사를 결정한다. 주주총회 등에서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권 및 지배권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펼 수 있도록 하는 '스튜어드십코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기업이나 정부가 개입할 수 없게끔 수책위의 독립성이 그간 중요한 가치로 꼽혀 왔다.
하지만 이번 의결에서 수책위원에 전문가단체 몫이 생기자 '자본·정권 개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설명한 전문가단체는 한국금융연구원, 자본시장연구원, 한국증권학회, 금융투자협회 등이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참여연대 등 306개 시민단체이 참여한 공적연금국민강화행동(연금행동)은 지난 8일 성명에서 “금융자본과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가 대부분”이라며 “한국연금학회 역시 대기업 금융, 보험회사가 주축이 되어 꾸린 곳이며, ESG 책임투자 관련 단체들 역시 기금운용본부의 용역을 수주하는 등 자본의 영향이나 이해관계 상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보통 일주일 전에 기금위 안건을 주던 복지부가 안건을 전날 상정하고 급하게 의결 처리하면서 '이례적'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노동계 기금위원 3인은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퇴장했고 연금행동은 “기금운용위 위원장인 복지부 장관은 일방적인 표결처리를 강행했다”고 했다. 수책위에서 활동했던 전 위원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복지부가 수책위 결정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여러 전문가 중 복지부가 고를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 위원은 이어 “박근혜 정부 시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사태는 개별 기업의 개별 사건이었다면 이번 의결은 구조적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삼성 때와 같은 일이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긴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정치 편향' 논란이 있는 검사 출신 한석훈 변호사 상근전문위원 선임과 겹치면서 복지부를 향한 국민연금 개입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관련 기사 : 그렇게 전문성 독립성 강조하더니 검찰 출신엔 입 닫았다]
정부는 국민연금의 '전문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는 “수책위의 업무 분야가 검토·심의 분야가 해외주식 주주권 행사 등으로 확대될 예정으로 전문성에 대한 요구가 지속되고 있다”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위원 구성이 필요한 상황이나, 가입자단체에서만 추천 받도록 되어 있어 위원 구성에 한계가 있다. 관계 전문가단체로부터 추천받아, 다양한 전문가를 폭넓게 위촉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다수 언론은 복지부 설명대로 '전문성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노동계의 반대는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됐다. 조선일보는 8일자 12면 기사에서 반대 입장을 한 문장 다뤘고 한국경제는 해당 소식을 지면에 다루지 않았다. 세계일보는 8일 기사에 <국민연금 조직·운영 '대수술' 예고 수탁자책임 전문위 전문성 높인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국민연금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지난 1월 5차 재정추계 결과가 나오면서부터 언론이 '집중보도'한 이슈다. 국민연금의 낮은 수익률을 언급하고 이것이 전문성 부족에서 기인한다는 논리다. 언론이 여론을 만들고 정치권이 호응하는 모양새다. 류성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7일 언론의 수익률 보도를 받아 “국민연금 최근 10년 운용수익률은 연평균 4.9%로 세계 주요 연기금 중에 가장 하위 수준으로 나타났다”며 “이는 비전문가로 구성된 국민연금기금운용위 때문이라는 지적도 많다”고 했다.
[관련 기사 : '2055년 연금고갈' '월급 35% 날라간다' 연금 불신 조장 보도의 이면]
수익률은 통계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안정성을 추구하는 국민연금 수익률은 경제위기가 있었던 시기를 포함하면 타 연금에 비해 비교적 양호해지는 특징을 가진다. 언론이 '세계 꼴찌'라고 꼽는 수익률 통계는 국민연금 수익률이 타 연금보다 양호했던 2008~2009년 이후의 수치들이다. '역대 최악'이라고 꼽히는 지난해 운용 실적은 글로벌 연기금의 중간 정도에 속한다.
[관련 기사 : '국민연금 10년 수익률 꼴찌' 한국경제 보도 "나쁜 통계 억지로 만들어"]
지난달 '국민연금 연평균 수익률 꼴찌' 보도가 쏟아지자 원종현 당시 국민연금 상근전문위원은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캐나다, 캘리포니아 연금은 10~20% 대의 마이너스를 보였고 반토막 나는 연금도 있었지만 국민연금은 -0.18%에 그쳤다. 비교 시점 연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통계는 달라지는데 국민연금에 불리하게만 통계를 구성한 것은 다분히 악의적”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 관련 언론이 여론을 생성하고 정책이 변경되는 과정 속에 기업 의도가 숨어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기업들이 불편해하는 '주주'일 뿐 아니라 기업이 위탁운용에 참여할 수도 있고, 국민연금 불신이 계속되면 사보험 가입률이 올라가는 등 기업 이해관계와 철저히 맞닿아 있다. 국민연금 보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각종 기업 관계자, 전문가, 학회 관계자 또한 이번 수책위 구성 조정에서 이해관계가 자유롭지 않다.
[관련 기사 : 쏟아지는 '연금 공포 마케팅' 보도에 "재벌보험사 관계 의심"]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은 많은 부분을 위탁운용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위탁운용을 둘러싸고 금융기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굴리는 기금 규모가 커질수록 이를 감시하는 기금운용위원회 없이 금융기관 종사자들에게만 국민연금이 맡겨진다면 기금을 위탁시켜주고 추후에 그 회사로 이직하는 등 사익 추구의 장이 마련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정세은 교수는 “국민연금은 수많은 기업들의 주식을 가지고 있어 주주총회 등에서 국민연금이 발언하는 것 자체가 기업들에게 위협이 된다. 또 국민연금이 주주로 들어와 있어 (국민연금에) 보고해야 하니까 대주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불편하다.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정치세력, 기획재정부, 재벌, 여러 기업 등이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라며 “경제신문이 (국민연금을) 때리면 발맞춰 대통령실이 호응하는 모양새가 있었다. 정말로 국민연금을 걱정해서 이런 보도를 쏟아내는 것인지 따져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전문성', '수익률' 외에도 국민연금은 논의돼야 할 주제가 많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수익률 중심의 보도 자체가 금융사 중심적인 논의다. 국민연금은 개인투자와 다르다. 국민연금의 구조적 개혁 논의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수익률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며 “청년 임대주택이나 일자리, 공공병원 설립 등 미래 세대 생산성을 높여주는 방식으로 국민연금이 활용될 여지는 많다. 적극적인 사회투자로서의 활용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수익률 중심으로만 연금을 보면 논의 주제가 극히 한정적으로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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