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산재 역학조사는 ‘희망고문’…조사 기간 5년간 2배 급증

정환봉 2023. 3. 1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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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산재’ 황유미들의 733년
② 기다림은 절망이 되고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직업성·환경성 암환자찾기119’,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등이 9일 국회 소통관에서 연 산재처리 지연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3월6일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질병은 삶을 헤집는다. 종양의 크기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의사가 선고한 시한부의 시간은 고통으로 채워진다. 직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었다고 고통의 크기가 다르지 않지만 이들 앞에는 또 하나의 지루한 ‘심판’이 놓인다.

직업병에 걸리면 근로복지공단에 질병으로 인한 산업재해를 신청할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노동자의 질병과 업무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는 재해조사를 벌인다. 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면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근로복지공단의 직업환경연구원은 산재보험 적용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일반 질병 등 역학조사를 주로 맡고, 산업안전보건공단 산하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희귀병이나 신규 질환, 또는 예방 차원의 대규모 사업장 등을 조사한다. 두 기관에 들어오는 역학조사는 연도별로 편차가 크다. 최근 5년간 현황을 보면 2019년이 814건으로 가장 많았고, 2022년이 473건으로 가장 적었다. 다른 해에는 500~600여건 정도였다.

역학조사 기간 5년간 2배 늘어

문제는 역학조사 기간이 최근 급격하게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직업환경연구원의 경우 역학조사 소요 일수가 2018년 평균 211.8일에서 2022년 436.7일로 두배 이상 늘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같은 기간 385.9일 걸리던 역학조사가 664.4일로 길어졌다. 역학조사 기간을 규정한 법률은 없다. 단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내부 지침으로 ‘180일 이내’에 역학조사를 마무리하도록 했을 뿐이다. 강제 규정이 아니니까 실효성이 없다. 직업환경연구원이 신청인에게 회신한 역학조사 중 ‘180일 초과’ 비율은 2018년 42.7%에서 2022년 86.7%로 급증했다.

역학조사가 길어져 산재 승인이 늦어지면 신청자는 치료에 드는 모든 비용을 건강보험에 의존해야 한다. 건강보험은 치료 기간 임금을 보전해주는 휴업급여(평균 임금의 70%)와 간병료, 요양급여(치료비)를 지원하지 않는다. 나중에 산재가 인정되면 비용을 소급해 돌려받을 수 있지만, 질병과 싸워야 하는 노동자는 당장의 경제적 어려움에 피가 말라간다. 돈이 없어 더 나은 치료를 포기하기도 한다. 산재보험은 비급여 진료를 폭넓게 인정해주지만, 건강보험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만난 산재 신청 노동자 대부분은 병원비와 간병비 때문에 빚을 얻거나 비급여 치료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다.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일하다 2007년 세상을 떠난 황유미씨도 산재 신청 이후 소송까지 거쳐 7년 만에 보험금을 받았다.

역학조사 기관, 5년간 정원 못채워

역학조사가 늦어지는 일차적 원인은 인원과 예산 부족이다. 역학조사 기관 관계자들 말을 종합하면, 한달에 15개 안팎의 사업장을 조사해야 하는데 현재 인력으로 밀려 있는 사건을 처리하기도 어렵다. 특히 직업환경연구원은 최근 5년간 정원을 채운 적이 없다. 2018~2023년 사이 최대 8명까지 결원이 있었다. 올해에도 정원 18명 중 전문의 1명(정원 5명), 연구직 1명(정원 13명)이 결원 상태로 16명이 일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의사 채용이 힘들다. 지금 연봉(전문의 4명 평균 1억6천만원)으로는 올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예산도 부족하다. 근로복지공단이 우원식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직업환경연구원은 2022년 17억500만원의 신규 장비 도입 예산을 신청했지만, 기획재정부 예산편성 과정에서 1억2천만원만 반영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병 산재를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고 역학조사를 간소화·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밀한 인과관계 분석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질병 산재를 폭넓게 인정하고 예방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역학조사 등을 생략하는 ‘추정의 원칙’을 대폭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2017년 9월 특정 업종에서 일정 기간 이상 일한 노동자가 특정 질병에 걸릴 경우 재해조사에서 현장조사와 역학조사 등을 생략하고, 서면 심사와 전문가 자문 결과를 바탕으로 산재 여부를 결정하는 추정의 원칙을 도입했다. 2018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직종에서 발생하는 직업성 암 8종, 2019년 탄광부, 용접공, 석공 등의 직종과 석면에 의한 폐암 등, 2022년 근골격계 질환 등으로 그 대상은 점점 넓어졌다. 하지만 2022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 사건은 1466건으로, 전체 질병 산재 신청 건수의 5% 정도에 그친다.

“질병 산재 절차 간소화해야”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이제라도 정부가 역학조사 처리 지연 문제에 책임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직업성·환경성 암환자찾기119’,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등과 우원식 의원은 9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무리한 역학조사를 통한 협소한 과학적 증명에서 벗어나, 폭넓게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를 상대로 △산재 처리 지연에 따른 공식 사과 △역학조사 180일 초과 사건에 대한 산재 ‘선보장’ △인정 기준 확대 및 처리 기간 단축 등을 요구했다.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위원인 박미진 원진직업병관리재단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과 질병의 발생 양상을 고려하면 질병 산재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지금과 같은 방식의 역학조사로는 병목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어 제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구체적으로는 “직업 이력과 진단받은 질병 등으로 산재의 인과관계가 예상되면, 유해물질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등 절차를 간소화하는 조사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이종란 노무사는 “역학조사를 더 강화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본질이 아니다”라며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사건은 깊게 제대로 조사할 필요가 있지만, 대부분의 질병 산재는 추정의 원칙을 대폭 적용하고,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완화하는 등 정책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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