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3A.M.] 실패를 기록한다는 것

2023. 3. 9.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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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 8월 10일 일요일 오후 스웨덴 스톡홀름 항구에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파괴적 화력을 자랑하는 군함 바사호가 화려한 위용을 드러냈다.

'북방의 사자'로 불리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스웨덴을 유럽의 최강 해양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바사호를 만들었다.

스웨덴은 바사호를 박물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배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복원하고 바사호의 실패의 전모를 세심하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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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침몰군함 통째 전시… 전모 상세히 남겨
부끄러움 직시·탄탄한 자신감이 혁신 만들어
1628년 8월 10일 일요일 오후 스웨덴 스톡홀름 항구에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파괴적 화력을 자랑하는 군함 바사호가 화려한 위용을 드러냈다. 3000명 안팎의 인파가 몰렸다. 예포가 터졌다. 그러다 작은 돌풍이 불었다. 배가 왼쪽으로 크게 기울더니 열린 포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3년 가까이 걸려 만든 배는 1km를 항해하고 25분 만에 32m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렸다. 승선한 150명 중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탄은 순식간에 경악이 되었다.

‘북방의 사자’로 불리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스웨덴을 유럽의 최강 해양국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바사호를 만들었다. 배의 길이와 크기도 엄청났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함포를 2열로 배치했고 64문 함포가 탑재됐다. 정상대로라면 발트해의 가공할 해상 요새가 되었을 것이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다음날 조사가 시작됐다. 결과는 다소 허무했다. 아무도 처벌받거나 비난받지 않았다. 함포 하나, 부품 하나 문제가 없었다. 그날 술을 마신 선원도 없었고 대포도 제대로 발사됐다. 실패한 이유는 설계 자체였다. 지금까지 없는 가장 크고,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한 배를 만들라는 주문으로 배는 높고 좁았다. 위쪽 갑판에 설계보다 더 무거운 대포를 실었고 선체는 황금조각상이 가득했다. 배는 혁신적이었지만 뜰 수 없었다. 막판 실무자들은 배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지 못했다.

바사호는 발트해 바닥에 333년간 가라앉아 있다가 1981년 인양되었다. 스웨덴은 바사호를 박물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배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복원하고 바사호의 실패의 전모를 세심하게 기록했다. 1990년 개관한 바사박물관은 스웨덴에 온 이라면 누구나 찾는 명소다.

바사호의 사례에서 두 가지가 눈에 띈다. ‘국왕 프로젝트’가 망했는데도 희생양을 찾지 않고 실패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는 점(물론 왕의 과욕 때문이라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실패를 훗날 국가적 자랑이 되는 박물관으로 만들자고 결정했다는 점이다.

미국 벤앤드제리 아이스크림 버몬트 본사에는 실패한 제품들을 기리는 묘지가 있다. 1997년에 처음 만들어 아이스크림 묘비 약 40개가 세워져 있다. 전 세계 벤앤드제리 홈페이지에도 디지털 묘지가 개설돼 있다. 묘비에는 제품명과 레시피, 추도문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1989년 출시되어 1990년 판매중단된 피넛 버터 앤드 젤리의 추도문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조합!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이스크림엔 망해버렸고, 샌드위치에만 들어가게 되었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이스크림 묘지는 일단 재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의 역사를 창의와 모험의 역사로 바꿔놓고 있다.

실패를 기록하는 일은 부끄러움을 직시하는 용기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실패해도 내일은 또 다른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탄탄한 자신감이기도 하다. 바사호도 사실 그때 기술로 구현할 수 없는 과도한 혁신이었다.

용기와 자신감이 담긴 실패의 기록은 조직과 시장에 신뢰라는 큰 자산을 만든다. 지난해 신영증권 리서치센터가 ‘2022년 나의 실수’라는 반성문을 발간했다. 지난해는 온갖 예측과 전망이 어긋난 해였다. 김학균 센터장은 “때로는 맞히고, 때로는 틀리는 게 애널리스트의 일이지만 지나간 실수에서 배우지 못하면 앞으로 전망을 잘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도 실패라는 말을 쓰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면 다르게 정의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흥미로운 실수’는 어떨까.

이인숙 플랫폼9와4분의3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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