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칼럼] 버려진 아기에게 어머니만 있을리야

한겨레 2023. 3. 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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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숲에 탯줄도 안 뗀 아기가… 친모 키울 마음 없었다’. 이 사건을 다룬 한 신문기사의 제목이다. 독자들 댓글은 친모 비난 일색. 경찰은 아기엄마를 영아유기와 살인미수 혐의로 조사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사건에 사회가 책임을 지려 한다면, 아이아빠인 남성을 찾아 함께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이경자 | 소설가

‘분유값 벌러 성매매… 홀로 남은 8개월 아기 숨져’

어느 일간지 기사 제목은 이랬다. ‘집 비운 지 2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이라는 작은 제목 아래에 ‘재판부가 사회도 책임이 있다며 이례적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여성이 성매매에 이르는 과정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다.

어쨌거나 기사로만 보면 미혼모인 아기엄마는 혼자 아기를 돌보며 정부로부터 기초생계비와 한부모 아동양육비 137만원을 받았지만, 월세와 기타 생활비 등으로는 부족해 잠깐 성매매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책임을 인정한 재판부는 아기엄마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보호관찰 3년, 아동학대 재범예방 강의와 성매매 방지 강의 각각 40시간 수강 등을 명령했다.

기사에서 B씨로 불리는 아기엄마. 개인차가 있겠지만 아기가 8개월이면 엄마 목소리나 얼굴을 익혀서 엄마를 하염없이 쳐다보았을 것이고,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얼굴 가득 방긋 웃음도 지었을 것이다. 아기엄마는 아기의 옹알이도 수없이 들었을 테다.

어머니로서 B씨의 고통과 판결 의미 사이를 한참 들여다보는데, 뭔가 개운치 않다. 어정쩡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혹시 이런 건 아닐까? 홀로 아기를 돌보기 위해 성매매를 해야 했던 아기엄마의 처지에 대한 인간적 동정,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여성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 아기가 숨지며 더해진 법적인 처벌….

얼핏, 판사님께선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 정말 그런가? 사법부가 해야 할 일은 이 사건의 원인을 찾아 밝히고 처벌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했다. 아이를 여자 혼자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신조차 가능하게 할 수 없을 이 일에서 생명 탄생의 두 주체 중 한쪽, 아기아빠를 누락한 건 무지를 넘어 범죄에 가까운 일 아닐까. 판사는 기왕에 사회적 책임까지 짚어주지 않았던가.

올해 초엔 이런 일도 있었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월20일, 강원도 고성군 진부령둘레길을 걷던 관광객이 숲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수색 끝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도 거의 30m나 들어간 곳에서 편의점 비닐봉투에 싸인 아기를 찾았다. 폭설이 내린 뒤 영하의 추운 날씨, 탯줄도 떼지 않은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던 때였다.

아기를 구조한 이튿날, 경찰은 탯줄도 떼지 않은 채 아이를 버린 아기엄마를 찾아냈다. 강원도와는 사뭇 먼 경기도 안산시 한 주택에서였다. 20대인 친모는 경찰 조사에서 “전 남자친구 사이에서 낳은 아기로 처음부터 키울 마음이 없었다”고 진술했단다. 이 여성은 친구들과 놀러 간 강릉에서 아기를 출산한 뒤 유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눈 덮인 숲에 탯줄도 안 뗀 아기가… 친모 키울 마음 없었다’

이 사건을 다룬 한 신문기사의 제목이다. 독자들 댓글은 친모 비난 일색. 아이를 낳았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를 키울 마음이 없었다는 아기엄마. 함께 사랑했거나, 사귀었거나, 기억도 나지 않는 하룻밤이었거나, 어딘가로 끌려가 피멍이 들도록 맞은 뒤였거나, 하여튼 그 관계로 여성은 임신했다. 임신한 상태로 상대 남자와 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여성은 한 남자와의 관계의 징표인 아기를 눈 내린 산길 숲에 버렸다. 경찰은 아기엄마를 영아유기와 살인미수 혐의로 조사 중이라고 했다. 이런 사건에 사회가 책임을 지려 한다면, 아이아빠인 남성을 찾아 함께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성욕은 남자와 여자의 것이되, 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임신과 출산과 양육은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야 한다? 요즘도 언론이 더러 여성의 임신을 다루는 기사를 쓸 때는 ‘아무개 남성의 아이를 임신한 아무개 여성’으로 표현한다. 여자의 몸은 남성의 아이를 임신하는 도구 같은 느낌을 고착시키는 표현 중 하나다. 남존여비를 들먹일 것까지 없다. 이런 관점이 윤리도덕의 기준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아무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누구라는 표현이 남아 있듯이, 모든 변화가 무 자르듯 단번에 나타나지는 않을 테지만.

내가 열살이나 됐을까? 이런 일이 있었다.

“탯줄도 안 떨어진 햇아를 울타리 나무 틈새에 처박았더래유. 아를 낳은 처녀는 뒷산에 목을 맸더란대유….”

작은엄마가 엄마에게 소곤거렸다. 우연히 부엌으로 들어가려다가 이 말을 들은 나는 뭔가 신기하고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작은엄마에게 아이아버지는 누구냐고 묻자 작은엄마는 모른다고 했다. 이후 자살한 딸 때문에 그 집은 고향을 떠났고, 아이아버지였을 남자, 죽은 여자의 애인이었을지 모르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하면 여자가 제 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단죄했던 시절로부터 거의 70년이 흘렀다.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딸을 낳았다고 슬퍼하지 않고, 딸의 혼전 성경험을 수치로 여기는 부모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이런 시대도 있었다. 결혼을 앞둔 여성이 성경험이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 ‘처녀막 수술’이라는 것을 했고, 성경험이 없는 어린 여성을 특별한 요금을 지불하고 ‘사는’ 남성도 있었다. 여성의 나이를 가리지 않는 음란 불법동영상 등등. 여성의 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시대 성격에 따라 달라질 뿐, 그 본질은 여전히 평등에서 아득히 멀기만 하다. 이런 속에 의도적으로 외면받고 숨겨진 존재인 아기아빠가 있다.

70년 전 남성이 자신의 아이와 산모를 간접살해하고도 치외법권 지대에 있었듯이, 오늘날 버려진 아기 이야기에서도 아기아빠는 없다. 행위 주체 중 한쪽인 여성이 사회적, 법적 처벌 대상이 될 때 남성은 법적 보호를 받는 셈이다.

좀 정직해져 보자. 저 오랜 가부장 사회의 미풍양속에서 시작해서 소위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동등한 인권을 누린다는 민주 사회로 이행하는 동안 이리저리 휩쓸리며 변화해온 남성과 여성의 관계들을. 그 불공평과 불평등과 이기주의를, 순수하게 들여다보자. 눈감으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우리 삶의 기본 바탕에 모순을 놓아둔 채, 평화와 평등과 민주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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